영성 편지

'가난한 마음'을 위하여

이형선 2012. 9. 3. 08:55

가을이 오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습니다.

가을이 오는 소리는 어디서 들어도 좋습니다.

귀뚜라미 같은, 풀벌레 같은,

보다 작은 이웃들과 함께 들으면 더욱 좋습니다.

 

조석으로 제법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살아 있는 모든 나무들은

이제 자기 분량만큼의 가을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모든 나무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주어진 ‘한 해’라는 생명의 빛깔이었던

신록(新綠)의 생애가 헛되지 않도록,

남에게 온전히 내어줄 수 있는

자기 몫의 열매나

자기 몫의 단풍을 준비하며,

헌신을 위한 열심을 내기 시작합니다.

스스로 가난해지기 시작합니다.

 

인생 우리가 죽어도

자연이라는 세상은 남아 있는 것처럼,

한계의 삶을 살아온

한 해의 이파리가 죽어도

나무는 살아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푸른 나라’를 위해서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살아 있는 이파리들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를 살리고자

푸른 하나님의 나라를 살리고자,

자기를 비우면서

자기를 낮추면서

스스로 낙엽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이파리들은

봄의 신록도 사랑이고,

가을의 낙엽도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일을 아는 사람들은

밀물도 바다를 살리는 사랑이고,

진창 같은 갯펄만을 남기고 떠난 썰물도

바다를 살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압니다.

내세를 아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사랑이고

그리스도의 부활도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또한 믿습니다.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인생의 달고 쓴 모든 범사가

또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또한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일서4:16)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과는 달리

늘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기적인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그만큼,

자기의 각종 욕심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질 수 있는 그만큼,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이기적인 자기를 비울 수 있다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성령의 삶은

물의 흐름처럼 생수의 흐름처럼

차라리 쉬운 순리(順理)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낮은 곳, 비워진 곳으로 흐르는

물의 역사는 아주 쉽고 단순한 순리이자 이치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낮은 마음, 비워진 마음으로 흐르는

성령의 역사는 아주 쉽고 단순한 순리이자 이치입니다.

‘자기’가 없으면 거칠 것도 부딪힐 것도 없고,

싸울 것도 소동을 일으킬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런 ‘물의 사람’이나 ‘성령의 사람’이 불행해지던가요?

아닙니다. 오히려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며

더 큰 마음으로 더 잘 삽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이루며

더 큰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원히 삽니다.

한 마디로, 그런 마음이 곧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그런 마음을

‘가난한 마음(心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5:3)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는 모난 어떤 돌멩이

혹은 바위덩어리가 고집스럽게 박혀 있어서

물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령의 흐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일까요?

그럴수록 불행한 자는 ‘물’도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도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이고, 우리 자신입니다.

실인즉 보다 난해한 ‘웬수’는 늘 ‘자기’가 아니던가요?

 

스스로 어른이라는 그런 '자기‘가 아직은 없는,

그래서 되레 전적으로 오직 부모님만을 신실하게

의지하며 사는 유아를 우리는 ‘어린 아이’라고 말합니다.

어린 아이에게는 양식 등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내 것’, ‘내 소유’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아버지(어머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어린 아이의 마음’이

또한 ‘하나님의 나라(天國)’에 들어갈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이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18:16-)

 

따라서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의 기뻐하시는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자연의 마음'과 '어린 아이의 마음'을 통해서

생수의 강처럼 연연하게 흐릅니다.

‘가난한 마음’을 통해서 연연하게 흐릅니다.

 

물질적 부자인 ‘어른’은 부자가 될수록

‘부모님’이 아닌 물질에 매이고 물질에 의지하게 됩니다.

부모님이 없어도 능히 살 수 있다고 자신만만합니다.

잔소리(?)하며 간섭하는 부모님이 없으면

되레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을 위해 형제지간에조차

법정 다툼이나 살상을 불사하지도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물질적 가난은 불편하고

때론 우리를 지나치게 제한하고 구속(拘束)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가난해질수록,

우리가 지극히 작은 빵 한조각이나 말 한 마디나 인형 하나나,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 하나에도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게 하고, 서로 섬기며 사랑할 수 있게 합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의 인생’ 여정에서

과연 어느 쪽이 진정으로 복이 있는 마음이자 삶일까요?

분명한 것은, 우리의 마음은 가난하게 비울수록

자연이나 우주를 담을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담을 수 있는

영성(靈性)의 세계라는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보다 더 큰 꿈이나 비전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보다 더 영원한 이상도 소유도 없습니다.

세상의 재물이나 권력 등을 소유한 사람들이 너무 부러워서 연연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우주’를 소유한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살리는 참된 복이나 참된 소유는

실인즉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인 것을.

우리 안에 있는 ‘가난한 마음’ 그것인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밝히 볼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한 그리스도인의 영성 편지(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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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구약성경, 잠언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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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복을 주고자 원하시는데,

 이 영적인 복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첫째,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깨끗하게 되는 것이다. (…)

 

 둘째,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할 때 우리는 마음의 평안을 얻고,

 깨끗한 삶을 살며,

 이 세대를 위해 봉사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

 

                                                             *A. W. 토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