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언약 관계인 '한 몸의 비밀'

이형선 2012. 9. 17. 11:16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은 약혼 그리고 결혼이라는

  ‘언약’을 세상에 공표하면서 ‘한 몸’인 부부가 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세기2:24-)

 

 

   그렇습니다. 모든 진실한 사랑의 관계는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 관계입니다. 사랑에 대한 간결하고 함축성 깊은 정의입니다. 부부 내지 남녀 사이의 사랑의 관계도, 친구 사이의 사랑의 관계도, 가족 사이의 사랑의 관계도 다 그렇고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모든 관계의 근원이자 시원(始原)인 하나님과의 영적 사랑의 관계가 더욱 그래야만 합니다.

 

 

   영혼과 육신을 포함해서 죄악도 위선도 허세도 숨김도 과장도 열등감도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주어도 부끄럽지 않는 관계, 장점도 단점도 잘난 모습도 못난 모습도 액면 그대로 보여주어도 부끄럽지 않는 관계, 그것이 과연 진실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중요한 것은 부부간의 그런 사랑의 관계도, 하나님과의 그런 사랑의 관계도 다 ‘혼인 언약’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언약’이란 ‘책임’에 대한 동의어입니다.

 

 

   결혼이라는 ‘언약’을 통해 부부가 된 사람이 다른 남자나 여자 앞에서 ‘벌거벗으면’ 그것은 실정법으로도 ‘부끄러워해야 할’ 죄악이 됩니다. 그래서 ‘한 몸’이던 부부가 되레 상처를 주고 받는 ‘웬수’가 되어 헤어지기도 합니다.

   ‘언약’의 관계를 어기면 그 후유증이나 후폭풍이 결국 부메랑이 되어 자기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을 창조하시고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역시 그렇게 ‘언약’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 및 인류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택하시고 부르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렇게 ‘언약’을 맺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의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창세기17:7-9)

 

 

   그런 600여년 후, 출(出)애굽하여 마침내 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소원대로 정착한 이스라엘은 그러나 그 땅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다른 이방신들과 ‘영적 간음’을 자행하곤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신 그런 배신행위는 ‘전무후무한 지혜자’였던 솔로몬의 시대에 되레 절정에 달합니다.

   과연 예나 지금이나 풍요하고 ‘배부른 시대’에 그리고 스스로 유식하다고 자만하는 시대에 영적 타락은 심화되고 극대화됩니다. 솔로몬이 사랑했던 이방 여인들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 등이 솔로몬의 품 안에서 각각 자기 나라의 이방신들을 좇도록 유혹한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다원주의(多元主義) 신앙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시대의 영혼이 ‘영적 창녀’가 된 것입니다. 오늘도 다원주의 신앙을 가진 ‘여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산을 오르는 길이 동서남북으로 서로 다를 뿐 정상에서 다 하나로 만나는 것’이라고. 과연 그럴까요? 그게 대범한 구도자의 열린 마음 같지만 거기에 의외로 큰 함정이 있습니다. ‘같은 산’이 아닌 ‘다른 산’을 오르는 엉뚱한 ‘다른 길’도, 혼돈의 길도, 미혹의 길도 많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경건하고 더 영적인 것처럼 행세하는 종교나 교주일수록 문제의 함정은 그만큼 더 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독신으로 욕심도 사심도 없이 사셨지만, 세례요한 같은 금욕주의자나 고행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을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이미 과거적인 혹은 구약적인 ‘율법 차원’의 행태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며’ 죄인 및 병자들을 섬겼던 주님께선 스스로 거룩하다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금욕 행위를 조심하라고 누차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이 가는 데로 가고 멎는 데서 멎어야 한다.”

   그런 존 칼빈의 명언처럼, 우리는 주님께서 가는 데로 가고 멎는 데서 멎어야 합니다. ‘2012년 12월 종말설’이나 ‘재림과 휴거설’ 등도 다 성경을 넘어선 신비주의 유형의 허황한 미혹입니다. 우리에게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선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하나님)만 아신다”(마태복음24:36)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 앞에 진실로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가감(加減)하거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면, 결국 인간 우리가 바른 말씀, 참된 말씀을 잃고 미혹의 길에 빠져서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각설하고, 그래서 솔로몬에게 ‘진노’하신 하나님은 마침내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11:11)고 선언하십니다. 남북 분단의 비극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과연 솔로몬이 죽은 후, 나라는 두 토막으로 나눠져버립니다.

   솔로몬에게 반기를 들었던 여로보암이 나라를 양분시켜 북왕국의 왕으로 즉위한 것. 분단의 불행과 비극을 앓으면서도 남북 두 왕국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이방신들을 함께 섬기는 ‘영적 창녀’가 됩니다.

   그 결과는 비참한 멸망이었습니다.

   북왕국이 먼저 앗수르(앗시리아)에게 짓밟히고, 그 130여년 후인 기원전 586년에 남왕국이 바벨론에게 짓밟히면서 결국 다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 제국의 패권 무대가 바벨론에서 메데와 바사(페르샤)로, 그리고 헬라로, 그리고 로마로 이어지는 ‘신구약중간기시대’이자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구약(舊約)’ 곧 ‘옛 언약’에서 대대로 계시되어 있는 ‘대망의 메시아’가 세상에 오십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니라.-(마태복음4:17)

   무엇을 어떻게 ‘회개하라’ 곧 ‘방향을 바꾸라’는 말씀입니까? 영적인 이방신들이든, 세상의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신분이든, 혈육이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우상’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그 모든 우상들을 버리고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 순결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부터 복된 ‘천국(天國)’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가나안 온 땅’에 대한 지정학적 언약은 세상에 오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마침내 ‘천국’이라는 범우주적 혹은 초월적인 세계로까지 그 ‘언약’이 확대 및 확장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완료형으로 ‘가까이 와있는’ 천국. 신약(新約) 곧 ‘새 언약’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한복음14:6-7)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면, 독선적인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알았더라면’을 이해하지 못한 피상적 이해입니다. ‘내 헌신의 삶은 물론이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까지 너를 사랑할 것이다’라는 대속적(代贖的)인 그 의미를 안다면 결코 독선이 아닙니다. 독선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신부를 향한 신랑의 절대 사랑과 책임의 공적 선언이 됩니다. 죄인인 우리 인생에게 절대 구원자가 선포하는 절대 ‘혼인 언약’이 된다는 것. 구체적인 삶으로 책임지겠다는 진정성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기 선언’인 것입니다. 저 정도의 ‘신랑’은 되어야 모든 ‘신부’가 믿고 자기 운명을 맡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 인용된 말씀에서 세 차례나 강조되고 있는 ‘알다’는 이론적이나 관념적으로 아는 ‘알다’의 헬라어인 ‘오히다’가 아닙니다. ‘기노스코’입니다. 제가 링컨 대통령을 아는 것이나 고려시대 명기인 황진이를 아는 것은 ‘오히다’입니다. 그러나 ‘기노스코’는 ‘한 몸’인 부부 관계의 경우처럼 체험적으로 ‘알다, 동침하다, 깨닫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동침하는 곧 일대 일로 ‘한 몸’을 이루는 그런 체험적 교제 관계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진실한 신앙인이 되고, 그런 영적 비밀에 열리면 아버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 및 비밀도 함께 열린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요? 동일한 하나님의 성령과 진리의 역사이자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저 ‘한 몸의 비밀’에 열린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신도들)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에베소서5:31-33)

 

 

   그렇습니다. 혼인 언약 관계인 남편은 아내의 유일한 사랑이자 운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부(新婦)’인 우리의 유일한 사랑이자 운명입니다. 우리는 과연 ‘한 몸의 비밀’에 열려진 순결한 영혼들일까요?

   실상인즉 세상 재물이 더 좋고 다른 남자가 더 좋아서 이혼을 다반사로 여기는 이 시대의 영혼처럼 혹은 다원주의 시대의 영혼처럼 너무 잡탕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이스라엘 왕국이 결국 멸망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의 영혼들 역시 스스로 종말을 재촉하면서 흉악한 탐욕과 정욕과 잔인한 살상의 와중에서 피차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분명한 것은, 다른 남자들과 외도하는 ‘아내’의 운명을 책임질 남편은 없고, 내세까지 책임질 남편은 더더구나 없다는 것입니다. 썩어질 육체의 순결도 중요하지만 더욱 소중한 것은 영적 순결이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한 그리스도인의 영성 편지(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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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소리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늘 대화하는 것이다.

 사랑의 씨앗은 기도로 자란다.

 

 이것이 이해되지 아니하면

 아직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장 니콜라스 그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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