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가장 행복한 사람'과 '가장 불행한 사람'

이형선 2012. 10. 25. 10:37

 

 -솔로몬과 욥은 인간의 비참을 가장 잘 알았고,

  또 가장 잘 말한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었다.

  솔로몬은 경험에 의해 쾌락의 공허함을 알았고,

  또 한 사람은 재난(災難)을 통해 존재를 알았다.-

 

 

                                                      *파스칼*

 

 

  

  구약성경은 전무후무한 지혜와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 왕의 역사만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불행한’ 고난과 고통의 대명사인

  인간 ‘욥’의 역사를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포괄적이고 대표적인 의미에 있어서,

  오늘을 사는 인간 우리가 아무리 ‘행복한 사람’이어도

  ‘솔로몬’ 이상일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불행한 사람’이어도 천재(天災)와 인재(人災)를 통해

  열 자식과 재산을 깡그리 잃고,

  온몸에 악창까지 나서 ‘재 가운데 앉아 기와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는’ 그래서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을 남기고 아내마저 곁에서 떠나가버린 욥 이하일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쪽입니까?

   ‘가장 행복한’ 솔로몬 쪽입니까? 좋습니다.

   그래서 그 행복한 혹은 크게 성공한 삶을 통해 진실로 세상의 한계나 인간의 연약함 내지 비참함을 알았습니까? 그것을 알지 못했다면 당신의 삶은 일개 동물의 삶과 다를 것이 없는,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한 삶일 수 있습니다.

   ‘전무후무한 지혜자’ 솔로몬은 인생 후배들을 위해 그의 체험을 통해 절감한 인생의 공허함 내지 허무함과 비참함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도서1:2-3)

 

 

   세상적인 모든 수고도, 화려한 부귀영화도, 수많은 여인들과의 쾌락도 다 허무한 것이더라는 고백. 별것도 아니더라는 고백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던 솔로몬 왕이 유산처럼 남긴 것은 왕국의 남북분단의 빌미와 다원주의적 혼합신앙이라는 후세에 ‘가장 불행한 비극’ 그것이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현대문명이 ‘새 것’의 첨단을 걷는 것 같아도 아날로그 문명이 디지털 문명으로, 토속적인 문명이 글로벌한 빌딩 문명으로 환경이 바뀌었을 뿐이지 인간의 역사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희로애락이나 경쟁이나 약육강식 같은 역사가 바뀐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회전할 뿐이지요. 인생 및 지구촌 자체가 해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처럼. 고시대의 그 바람이 현시대인 오늘도 임의로 회전하며 부는 것처럼 말입니다.

 

 

   상대적으로, ‘가장 불행한 사람’의 대명사인 욥은 그의 비참하고 허무했던 고난과 고통의 삶을 통해 얻은 삶의 결론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허사가(虛事歌)가 아닌, 신앙고백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기42:5-6)

 

 

   ‘가장 불행한’ 삶을 통해 가장 크고 영원한 세계에 열린 것입니다. ‘귀’로만 습관적 내지 관념적 내지 율법지식적 내지 간접적으로 듣던 하나님을, ‘이제는 눈으로’ 곧 체험적 내지 인격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만난 것입니다. 영안(靈眼)이 열린 것입니다. 인생 최대의 축복이자 금세와 내세의 구원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축복이자 ‘갑절’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지난날의 어리석고 무익한 한탄이나 원망이나 자학의 언행조차도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가장 낮고 허무하고 비참하고 겸허한 자리인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 것입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자녀는 물론이고 재산 등의 소유도 처음 것보다 ‘갑절’이나 되는 복을 주십니다.

 

 

   파스칼의 명언을 빌자면, 솔로몬이나 욥은 과연 ‘생각하는 갈대’였습니다. ‘갈대’는 인간의 연약함이자 비참함이지만 ‘생각하는’ 그것은 동물과는 다른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위대함입니다. 성경적으로 풀자면, 저 명언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갈대’라는 의미로 승화시켜 볼 수 있겠지요. 일찍이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의 변증법을 통해 신(神)의 구원 및 사랑에 이르는 길을 증명하고자 했던 파스칼은 과연 깨달음의 세계가 컸던 ‘요절한 천재’입니다.

 

 

   여하간 그럼 결론적으로, 우리를 살리는 그래서 본받아야 할 인생의 진정한 지혜는 어느 쪽일까요?

   솔로몬일까요? 욥일까요?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영국의 극작가 버너드 쇼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땅 위의 모든 책이 다 불타버리고 단 한 권의 책이 남는다면 ‘구약성서 욥기’를 택하겠다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의미심장한 말입니다만, 전 여기서는 그 의미를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우리 속담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오늘 행복하고 내일 허무 내지 불행한 것보다, 오늘 불행하고 내일 행복한 것이 더 낫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먼저 인간의 연약함 내지 비참한 한계를 뼈저리게 알고 그 비참을 통해 위대한 ‘구원의 하나님’, ‘소망의 하나님’을 만날 때 자기도 살리고 이웃도 배려하며 살릴 수 있는 보다 큰 ‘그리스도 인격’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인간 자기의 비참함을 모르면 그 누구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럴 경우 결국엔 스스로 유식한 인본주의적 이성(理性)의 종교인이나 바리새인의 습관적 외식 신앙 같은 ‘교만’의 함정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신정통파 신학자 칼 바르트가 ‘거룩한 비참(Holy Sadness)’이라고 높이 평가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다시 들어봅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로마서7:24)

 

 

   저 ‘곤고한’ 곧 ‘탈라이포로스’는 괴로움이나 곤란을 받고 있는 ‘비참한, 불쌍한’ 실존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갈대’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인생의 비참함을 통해 절대선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하나님의 자녀인 갈대’로 승화 내지 성숙되어야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런 ‘갈대’에게 ‘들의 백합화보다 못한 솔로몬의 모든 영광’(마태복음6:29)보다 더 크고 영원한 가치이자 행복이자 축복 자체인 ‘하나님의 나라’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로마서7:25)

 

 

                                                                                        *한 그리스도인의 영성 편지(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