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복이 있는 '온유한 자'의 초점(焦點)

이형선 2012. 11. 1. 10:20

 

-“온유한 자(the meek)는 복이 있나니.”

   예수님의 말씀이다.

   온유하다는 말은 약하다는 뜻이 아니다.

   초점이 잡혀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길들여진 종마(種馬)를 가리켜 사용된 단어다.

   온유란 힘에 방향이 잡혀 잘 통제된 상태이다.

   하나님께 받은 자신의 책임을 잘 아는 자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한 분 뿐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것을 그만둔 자들은 복이 있다.

   이 땅에서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

   그 일에 주력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

 

 

                                                  *맥스 루카도*

 

 

  

   오늘을 사는 우리 인간들의 성격이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고 특징이 있듯이, 성경속의 인물들을 보면 역시 그 성격의 특징이 다릅니다. 예컨대 쌍둥이지만 형 에서는 야성적이고, 아우 야곱은 조용하면서도 간교한 성격의 인간형입니다. 사울 왕은 유독 시기심이 많은 인간형이고, 유다는 지나치게 재물을 밝히는 타산적인 인간형입니다.

 

 

   상대적으로 신문도 대중소설도 아닌, 성경에서 ‘온유(溫柔)한 자’라는 평가 내지 인정을 받고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인물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구약성경에 있는 ‘출애굽의 대선지자’ 모세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a very humble man)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수기12:3)

 

 

   저 ‘온유한’의 원어를 찾아보니, ‘아니’로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겸손한’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모세의 심령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보다 더 ‘가난했다는, 겸손했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모세라는 인간형의 신앙인격을 한 마디로 집약시키자면 그래서 ‘온유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또 한 분은 신약성경에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gentle)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11:28-30)

 

 

   ‘온유한’의 영역이 ‘meek'로 된 곳도 있고, ’gentle'로 된 곳도 있어서 역시 묵상하면서 원어를 찾아보니, 이상의 두 곳 모두 ‘프라우스’로 되어 있습니다. ‘겸손한, 온화한, 친절한’이라는 의미입니다.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관계에서의 초점(焦點)이 그리고 이웃 곧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초점’이 잘 잡힌 신앙인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초점은 ‘가난함, 겸손함’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초점은 ‘온화함, 친절함’입니다. 물론 그것이 교회의 초점이기도 합니다.

 

 

   교회 내지 신앙인의 초점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주님의 말씀과는 달리, ‘먼저 내 소원성취와 만사형통의 복을 구하는’ 기복(祈福)신앙에 그 초점이 잡혀있으면 그것은 가난함 곧 ‘자기 비움’이 아닙니다. 이기적이고 탐심적입니다. 겸손함도 아닙니다. 교만함입니다. 그렇게 왜곡된 ‘복음’이라면 그 생명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교회는 물론이고 가정이든 사회의 직장에서든 ‘내 일’보다는 먼저 ‘주님의 일, 하나님의 일’이 잘되도록 기도하며 노력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중심을 하나님이 인정하실 때, 어렵거나 고통스러운 ‘내 일’에도 마침내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노년의 전부이자 가장 소중한 가치일 수 있는 독자인 ‘내 아들 이삭’의 안위나 형통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 그 뜻 내지 섭리에 순종해서 이삭의 목숨조차도 제단에 바치는 ‘내 아들의 희생’을 믿음과 삶으로 실천했을 때, 그 중심을 보신 하나님이 그의 성숙한 믿음을 인정하시고 오히려 그와 그의 아들 이삭과 그의 후손들을 대대로 축복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시험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합격한 것처럼, 오늘도 세상살이의 각종 크고 작은 파란곡절이나 병고 등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 역사 그 ‘믿음의 시험’에서 마침내 ‘믿음의 사람’으로 합격할 수 있는 사람은 또한 그렇게 대대로 ‘천국’의 복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죽어도 사는’ 천국의 복이 있을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 앞에서는 넙죽 엎드리는 ‘겸손한’사람이, 사람 앞에서는 상대적으로 교만하거나 지배적이거나 냉정하거나 불친절하다면 그런 ‘초점’ 역시 하나님 앞에서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속과 겉이 다른, 신앙과 삶이 다른 ‘위선’입니다. 스스로 경건 내지 독실하다는 그래서 축복받았다는 ‘바리새인들’ 유형의 그릇된 신앙이 그것입니다.

 

 

   ‘온유한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라면, 이미 스스로 배부른 자들이 되어 배부른 자들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친목계’ 같은 교회라면, ‘곗돈’이 없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곧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작은 자들이 찾아가기에는 어려운 ‘교회’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방황 및 번민하는 무리의 자살률은 세계 1위로 늘어나도, ‘우리의 아성, 내 아성에서 나와 내 자식들’만 대대로 잘 먹고 잘 살면 된다? 그것이 과연 축복일까요? 그것이 영적 재앙은 아닐까요? 그런 이기적인 축복의 아성이나 교회는 결국엔 사회나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받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저는 근시(近視)이기에 안경을 쓴 사람입니다. 안경을 벗으면 순식간에 초점이 틀어져서 먼 곳에 있는 것은 제대로 보이는 것이 도무지 없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이 순식간에 불안해지고 불행해집니다.

   우리의 신앙의 시각은 과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초점이 잘 잡혀 있는 것일까요?

 

   인생 우리의 성격이나 인격은 어떤 한 마디의 수식어로 평가 및 집약될 수 있을까요? 탐욕적인 사람? 간사한 사람? 사심이나 시기심이 많은 사람? 냉정하고 인색한 사람? 불친절한 사람? 주색에 빠진 사람?

   아니면, 거듭나서 하나님 앞에서 늘 심령이 가난하고 겸손한 사람, 아울러 사람 앞에서 온화하고 친절한 사람 그래서 한 마디로 ‘온유한 사람’?

   당신이나 저의 현재의 삶이나 미래의 묘비명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집약되어질 수 있기를!

 

 

                                                                                        *한 그리스도인의 영성 편지(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