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漢) 나라 황실의 후예로, 한실을 부흥시키고자하는 큰 뜻을 품었던 7척 5촌의 거구 유비. 그는 10년여 세월 속에서 무수한 전투를 치르지만 하늘이 외면한 듯 불운 내지 비운의 연속일 뿐입니다.
관우, 장비, 조운 등 뛰어난 장수들이 휘하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뿌릴 내릴 거점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조조에게 쫓기는 몸이 되어 형주의 유표에게 가서 그의 영역 안에 있는 조그만 성 한 채를 맡아서 겨우 연명하는 신세가 됩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오십을 바라보고 있었고, 천하대세는 강북을 평정한 위나라의 조조와 강동에서 세력을 떨치는 오나라의 손권의 손아귀에 있었습니다.
유비가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제갈공명을 만난 때는 그 몇 년 후인 서기 207년입니다. 그 다음 해에 유비는 손권과 손잡고 조조와 숙명의 대결을 감행한 저 유명한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의 승리를 전기로 해서 이름을 떨치며 양자강 중류의 요지인 강릉으로 진출하여 비로소 뿌리를 내리면서, ‘삼국지’의 한 세력으로써 명실공히 천하를 호령하는 촉나라 군주가 됩니다.
이미 오십대인 거구의 유비가 겨우 27세 밖에 안 되는 새파란 공명을 ‘모셔 와서’ 침식까지 같이 하며 깍듯이 모사(謀士)로 모시자, 관우와 장비는 체면이 사납다 싶어 영 못마땅해 합니다. 참다못한 저들이 마침내 유비에게 그것을 들어 불평하자 그때 유비는 공명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하며 타이릅니다.
“공명과 나는 물과 물고기 같은 사이야.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어. 이 점을 잘 헤아려주길 바라네.”
이른바 ‘수어지교(水魚之交)’입니다.
과연 공명으로 인해서 유비는 ‘촉나라’를 얻었습니다.
한 시대, 한 세상에서 한 나라를 얻는데도 그렇듯 특정인물과의 만남의 중요성이나 관계의 생명성이나 진정성은 그렇게 필연적인 것입니다. 실인즉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스스로 한동안 파닥거리다가 죽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금세와 내세에 걸친 영원한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天國)’을 얻기 위해서는 당연히 특정인물과의 만남의 중요성이나 관계의 생명성이나 진정성은 필연 이상으로 절대적인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세상에 오신 특정인물이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한복음15:5-6)
그러니까 ‘목지지교(木枝之交)’가 됩니다.
가지는 나무에서 떠나면 그대로 죽습니다. 물고기처럼 스스로 살아보고자 파닥거릴 능력조차 없습니다. 그대로 말라서 죽은 것만도 딱한데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른다’고 말씀하셨으니, 두 번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靈) 그리고 육(肉)의 죽음이자 금세 그리고 내세의 죽음을 의미하는 말씀이 됩니다. 세상에서의 죽음만으로 끝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니?
예수 없는 사람들,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세상에서 자기 할 것 다하면서 잘만 살더라? 심지어 불의하고 포악한 부자나 명사나 권력자들도 한 세상 행세하며 부귀영화 누리고 잘만 살더라? 죽기는 누가 죽어? 잘만 살던데?
그렇게 회의나 반론을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가려면 미국 입국비자가 있어야 합니다. 중국에 가려면 중국 입국비자가 있어야 합니다. 미국이나 중국에 안 가도, 한국에서는 물론 자기 할 것 다하면서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나 중국의 광활한 세계는 모른 채, 저같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야겠지요,
그렇듯 영원한 생명의 세계인 천국을 모른 채 사는 인생은 더더욱 딱한 ‘우물 안 개구리’ 되겠지요. 하긴 스스로 배부른 시대가 되어갈수록 미국이나 중국이나 외국 관광 등에 대한 관심은 뜨거워져가도 천국에 대한 관심은 식어져가는 세태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인생의 진정한 생사화복(生死禍福)이나 안식(安息)의 비밀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계신 곳은 미국도 중국도 아름다운 외국 관광지도 아닙니다. ‘천국’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구원은 천국에 있다는 것입니다. 영혼은 물론이고 육신의 삶조차도.
성경은 영혼이 죽은 사람은 세상에서 성공한 거물이다 쳐도 ‘살았으나 죽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인격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인 영혼이 죽은 사람은 동물 내지 짐승과 같으니까, ‘부귀영화를 누려도’ 살았으나 죽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시쳇말로 ‘정치적 생명’이나 ‘사회적 생명’이 죽어도 사계에서 은퇴한 그 사람의 ‘생물학적 생명’은 살아 있습니다. 그렇듯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모르는 이기적인 ‘생물학적 인생’은 살았으나 죽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유비도 공명도 조조도 죽었고, 불로초를 갈구하던 진시황도 죽었고, 솔로몬도 죽었고, 미색인 양귀비도 클레오파트라도 죽었습니다. 모두 빈손으로 허무하게 다 죽었습니다.
‘천국’은 세상의 저 모든 부귀영화보다 더 길고 더 큰 세계를 보는 안목에의 열림입니다. 영안(靈眼)에의 열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은 자들의 ‘천국’이란 금세와 내세에 걸친 영원한 생명이자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금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죽어도 사는 부활의 천국, 영원히 사는 부활의 천국,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가난해도 부유해도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천국, 실패해도 성공해도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천국, 건강해도 심지어 죽을 병에 걸려도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천국,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천국’은 고대의 저 ‘삼국지’처럼 그리고 오늘 우리나라의 삼국지인 ‘대선(大選)’ 판국처럼 남과 싸워서 얻는 ‘겉세계’의 나라가 아닙니다. 되레 자기를 부인해서, 자기와 싸워서 얻는 ‘속세계’의 나라입니다. ‘가지’인 자기 자리와 분수를 알고, ‘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낮이든 밤이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항상 겸손하게 붙어 있을 때 임하는 심령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17:20-21)
‘가지’는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을 때 가장 가치 있고 복되고 보람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이기적인 나무가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아는 우리’가 되어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입니다. ‘한 몸’인 가지를 불행으로 인도하는 나무는 없습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습니다.
‘가지’에게는 성공도 실패도 없습니다. 성공도 실패도 다 ‘포도나무’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영광을 받기 위해서 혹은 너무 낙심 내지 절망에 빠져서 ‘나무’ 곧 ‘영의 비밀이자 구원의 비밀인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나간 ‘가지’가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자초하는 그런 가지를 어리석다고 쉽게 비웃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어리석은 가지’가 때론 세상을 사는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는 거기에 있습니다.
*한 그리스도인의 영성 편지(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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