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저녁, 어떤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여덟 자녀를 둔 한 힌두교인 가정에서
며칠 전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굶주리고 있다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들에겐 먹을 게 전혀 없었습니다.
나는 한 끼 식사로 충분한 양을 가지고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몹시 허기져 보였고, 아이들의 눈은 툭 불거져 나와 있더군요. 말할 수 없이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쌀을 건네자 아이들의 어머니는 그것을 반으로 나누어 가지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잠시 후에 그녀가 돌아오자 나는 그녀에게 어디에 갔다 오셨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들 역시 굶주리고 있습니다.”
‘저들’이란 식구 수가 같은 옆집의 이슬람교인들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굶주림이 어떤 것이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쌀을 나눌 수 있는 용기와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 얼마 되지 않지만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어머니의 행복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날 저녁에는 쌀을 더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음날 조금 더 가지고 갔습니다.-
*마더 테레사*
그렇습니다.
사랑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행복도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이나 행복은 지극히 작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이웃 혹은 타인을 배려하는 작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을 한 마디로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지사지’에 대한 국어사전의 해설은 이렇습니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함.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봄.’
‘세상에서 사는’ 우리는 남보다 재물이나 권력 등 가진 게 많아질수록 그것을 나눠서 남을 돕고 살리기보다는 이상하게도 되레 더욱 더 챙기기 위해서 탐욕을 부립니다. 바닷물은 마실수록 갈증이 더 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기 먹고 살 것은 물론이고, 자식들 몫까지 나아가서 손자들 몫까지 자자손손 챙기려는 탐욕에 빠집니다. 가족이기주의 내지 집단이기주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독립심을 키워주지 못하는 그것은 ‘내리사랑’이라기보다는 자식이나 손자들은 ‘나보다 더 무능한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그래서 내가 챙겨줘야 산다는 그릇된 혈통이해이자 노파심이 되겠지요.
과연 그것이 사랑일까요? 과연 그것이 행복일까요?
한편, ‘세상에서 사는’ 우리는 남보다 재물이 많다고, 신분이나 자리가 더 높다고, 남보다 더 많이 배워서 유식하다고 해서 그것으로 남의 위에 군림하며 위세를 부리기 마련입니다. 심지어 그것을 나누는 ‘선(善)을 베푼다’고 하면서도 마음의 중심은 한 마디로 자기과시적입니다. 그것은 적선이나 동정이나 이벤트가 될 수는 있어도 진실한 마음이 담긴 사랑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우리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모습과 다른 것이 과연 있는 것일까요?
남보다 재물이 더 많거나 남의 교회보다 헌금이 더 많다고 해서, 나아가 그것으로 ‘선을 베푼다’고 하면서도 마음의 중심은 한 마디로 자기과시적인 것은 아닐까요? 남보다 신학 지식이나 성경 지식 댓 줄 더 안다고 해서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것처럼 자기과시적으로 남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려고만 하는 것은 아닐까요? 삶으로서의 모범은 보이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에서 성공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던 '부자'보다도 '거지 나사로'의 영혼이 더 신실하고 더 큰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부자와는 달리 죽은 후에 '낙원'으로 갔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고 아울러 겸손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나보다 더 크고 깨끗한 영혼일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자'들의 인간성이나 존엄성을, 썩어질 세상의 영화나 가치로 함부로 재단 및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나라’에 열리면, 남보다 더 성공했거나 재물을 더 많이 가졌거나 지식이 더 많은 자일수록 남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입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남보다 건강이나 능력이나 지혜를 더 주신 하나님께 진 ‘빚(debt)’인 더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더 겸손하게 남을 섬기며 남과 더 나눌 수 있어야한다는 의미입니다. 남보다 위에서 베푸는 자기과시적이 아닌, 상대방의 처지를 배려하는 역지사지의 중심으로 말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그것은 남의 아래에 설 때, 남을 아래서 섬길 때 비로소 남을 ‘이해한다(understand)’는 의미와 하나로 통합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 인격이자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무례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보다 더 크고 영원한 세계인 ‘천국’을 보지 못하고, 세상의 별 것도 아닌 상대적인 재물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자기 선행 등으로 인해 신앙적 독선이나 교만에 빠져서 ‘무례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저 마더 테레사처럼 ‘선한 일’에 되레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8:21)
사도 바울은 또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린도서8:13)고 말씀했습니다.
자기중심이 전혀 아닙니다. 역지사지입니다.
과연 그래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와 뜻과 사랑이 이루어졌습니다.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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