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모 방송국의 방송을 통해
어떤 여자 분이 웃음소리와 함께 활달하게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 그래서 제가 헌금을 좀 했거든요. 하나님이 30배, 60배, 100배로 채워주실 것을 믿고 했습니다.”
저는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닌 빠듯한 서민의 살림살이에서
누군가를 돕기 위해 헌금을 할 수 있는 그 자매님의 선한 마음을,
하나님이 기억해주셔서 그 자매님의 믿음대로 ‘30배, 60배, 100배’로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솔직히 좀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그 자매님의 소원대로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을 받으면 좋겠지만, 세상 만사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만 혹은 우리 좋을 대로만 꼭 풀리는 것은 아니지 않아요. 따라서 그렇게 채워지지 않는 일이 몇 차례 반복이라도 된다면 그 자매님이 혹시라도 하나님께 ‘투자한(?)’ 돈의 액수 이상으로 실망을 하게 되고, 그래서 신앙생활 자체에 시험이라도 들지는 않을까하는 기우(杞憂)마저 들었습니다.
실인즉 교인들이 헌금을 하면 목회자 분들이나 교우들 상호간에 “30배, 60배, 100배로 채워주십시오”라는 축복기도를 해주는 모습을 신앙영역 주변에서 어렵잖게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이 축복해주시길 원합니다. ‘목자’가 ‘양’이나 ‘양들의 가족’이 ‘건강하고 범사에 잘 되기를’ 바라며 축복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남을 비판하거나 저주하는 것보다 축복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또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구별해야 할 문제는, 그것이 미신적인 기복(祈福)신앙으로 길들여지는 행태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복도 물질적인 복 곧 세상적인 복이 있고, 성경에서 ‘참된 복’이라고 말씀하는 영적인 복 곧 신령한 복이 있습니다. 따라서 전자의 복을 중심으로 기원하는 신앙을 우리는 ‘기복신앙’이라고 분별합니다.
‘기복신앙’에 대한 국어사전의 해설은 이렇습니다.
-복을 기원함을 목적으로 믿는 미신적인 신앙.-
회개나 깨달음을 통한 심령이나 인격이나 인간됨 자체의 변화나 성숙이 없어도, ‘복채’만 많이 내면 소원 성취하고 만사 형통한다고 믿고 그렇게 복을 기원하는 기복신앙은 샤마니즘 같은 하등의 무속신앙일수록 그 미신성(迷信性)이 더욱 강합니다. 물론 모든 고등종교에도 기복신앙의 성향은 있고, 그것이 꼭 나쁜 것도 아닙니다.
인간 누구에게나 자신은 물론이고 자기 가족이나 마음에 머물러 있는 분들이 다 건강하고 범사에 잘되기를 바라는 심성은 있고, 그것은 선한 마음이자 사랑의 마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렇게 감사한 분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삽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세상 만사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만 혹은 우리 좋을 대로만 풀리는 것은 아니라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럴 것이 세상 재물이나 범사에는 ‘속임성’ 혹은 ‘기만성(欺瞞性)’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13:22-23)
저 ‘재물의 유혹(the deceitfulness of wealth)’은 곧 ‘재물의 기만성’을 의미합니다. 재물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에는 ‘공중 권세를 가진 사탄’ 곧 악령에 의한 ‘속임성’ 내지 ‘기만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의롭고 신실하게 살려는 사람들에게 시험이나 고난이나 핍박이 되레 더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 및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절대 가치는 우리가 기복신앙을 통해 구하는 세상이나 육신 중심의 그런 가치가 아니고, 영혼과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영원한 생명(永生)’ 중심의 가치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각별히 사랑하기에 보다 순결하고 보다 성숙한 영혼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그래서 육신적 내지 세상적인 고난을 때론 허락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도 때론 원치 않는 병이 들기도 하고, 사업이 실패해서 재물을 잃기도 합니다. 심지어 병고나 사고로 졸지에 가족과 사별하는 등의 우환이나 불운이나 불행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고난의 대명사’로 통하는 ‘동방의 의인 욥’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복신앙’이라는 하등(下等) 내지 하향(下向)적 신앙의 풍조에 길들여지면, 고난이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외면해버린 사람들이 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됩니다. 남들보다 죄악이 더 많아서 축복 대신 심판 내지 저주 받은 사람들이 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 같은 이해이자 ‘풍조에 밀린 요동’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에베소서4:13-14)
그럼 여기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고난의 대명사’로 통하는
인간 ‘욥’이 고난을 받은 그 이유의 핵심이자 그의 신앙의 핵심을 상고해 봅시다.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기1:1)였습니다.
자녀 복도 많이 받아서 ‘아들이 일곱이요 딸이 셋’입니다. 당시의 재산이었던, 소나 양 같은 가축떼나
종 등의 소유도 많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를 칭찬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없느니라.-
그러자 ‘사탄’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욥이 당한 모든 고난과 고통과 시험의 주제이자 핵심이 집약된 구절입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for nothing)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욥기1:9-11)
그러니까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과 영적 자녀의 신실한 관계를 이간질시키려는 ‘사탄’의 저 대답을 한 마디로 줄이자면, 욥은 신앙은 “기복신앙이다” 그것입니다.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넘치게’ 축복하셨으니 그렇게 복을 받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렇게 폄하한 것입니다. 거래 조건 혹은 ‘까닭 없이’ 아버지 하나님이나 말씀 곧 진리 자체를 사랑하기에 경외하는 순수한 신앙이 아니라, 실속을 챙기는 ‘까닭 있는’ 기복신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사탄의 제의대로, 사탄에게 욥의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따라서 이후 욥이 받은 고난은 그의 과거의 죄악 때문에 인과응보(因果應報)적으로 받은 고난이 분명히 아닙니다. 사탄에게 인간의 고난을 허락하시는 오묘한 그리고 난해한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의 또 한편이 거기 있습니다. 그것은 남달리 고난이 많았던 사도 바울의 저 증언이자 고백처럼,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 하기 위한, 영적 훈련과 연단과 성숙을 위한 섭리의 비밀인 것입니다.
그 후 욥은 모든 재산 곧 가축떼를 잃고 맙니다. ‘스바 사람’이나 ‘갈대아 사람’의 무리들에게 빼앗기고, 하늘에서 떨어진 번갯불에 의해 소탕당한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광야에서 불어닥친 돌풍에 의해 집이 무너지면서 열 자녀가 한순간에 죽고 맙니다. ‘스바 사람’이나 ‘갈대아 사람’에 의한 인재(人災)는 탓할 상대나 이유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번갯불’이나 ‘돌풍’은 ‘천재(天災)’입니다. 사람들이나 강도들에게 당한 것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늘마저 나를 버리신 것인가? 그것은 절대 고독입니다. 하소연할 최후의 보루조차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심한 하늘’을 원망하며 절망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Why? Why? Why me?"
그러나 욥은 그래도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고’ 이렇게 신앙고백하며 순수 신앙을 지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갈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1:21)
그러나 고난은 빈털터리가 된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욥 자신의 몸마저 병들어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납니다. 악창이자 피부암입니다. 그래서 욥은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긋고 있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아내마저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며 그를 힐책합니다. 그러니까 ‘욥의 아내’는 사탄의 말처럼 ‘까닭 있는’ 기복신앙인이었던 것으로 입증이 된 셈이지요.
나아가 인과응보 사조 내지 기복신앙 풍조에 길들여진 ‘세 친구들’이 위로한답시고 찾아와서 돌아가며, ‘네가 받은 고난은 죄악 때문이다. 회개하라’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율법적으로 훈계하려고만 듭니다만, 그러나 욥은 고통 속에서 때론 인간적인 도리 없이 인간적인 신음과 낙심은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하나님 중심의 신앙과 소망을 잃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욥기23:10-)
그의 아내와는 달리 호의호식이나 재물 같은 ‘기복신앙’이 아닌, 순수한 ‘하나님의 입의 말씀 중심의 신앙’의 자리를 끝까지 지킨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욥은 처참한 고난을 통해 인간의 한계와 비참함을 절감하고, 진실로 복된 구속자(救贖者) 곧 대속자(代贖者) 신앙과 현세적 그리고 내세적인 부활신앙에 확실하게 열립니다. 일찍이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영성의 비밀에 이렇게 열린 것입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代贖者)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욥기19:25-27)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이자 신비인 ‘부활신앙’에 열리면, 우리는 ‘육체 밖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도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죽어도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열리면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삽니다. 금세에서도 살고 내세에서도 삽니다.
그래서 사탄의 말처럼 기복신앙이 아닌, 설령 죽을지라도 말씀 중심의 신앙의 자리를 끝까지 지킨 욥은 마침내 그의 ‘믿음’대로 하나님을 ‘내 눈으로’ 직접 만납니다. ‘귀로’ 들어온 이론이나 율법 내지 신학 지식이나 교리 차원의 하나님이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인격적으로, 일대 일로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격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기42:5-6)
여기서 파스칼의 명언을 다시 들어봅시다.
-인간의 비참(悲慘)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면 절망에 빠진다.
하나님을 알고 인간의 비참을 모르면 교만에 빠진다.-
인간의 비참 내지 허무한 한계를 크게 앓아본 자만이 갈파할 수 있는, 과연 명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비참함을 모르기에 그래서 교만한 그래서 ‘우매한’ 신앙인이었던, 신약시대의 바리새인 같은 욥의 세 친구들을 ‘노하시어’ 되레 꾸짖습니다. 그리고 ‘고난의 신비’를 통해 되레 인간의 비참함을 알고 아울러 거기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그래서 온전하고 장성한 분량의 신앙인격이 된 욥에게, ‘곤경을 돌이키시고 …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시는’ 축복을 베풀어주십니다.
-그 후에 욥이 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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