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태생의 작가 시튼이 쓴, 「시튼 동물기」에 나오는 ‘이리 왕(王) 로보’.
로보는 뉴멕시코주의 카란보 지방 일대에서 악명이 높은 잿빛 이리입니다. 교활하리만큼 지혜 있는 로보와 그의 일당인 이리떼에게 매일 밤 가축이 물려죽는 등 엄청난 피해가 속출하지만 대책이 없었던 주민들은 마침내 로보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내겁니다.
그 후, 각지에서 한다하는 사냥꾼들이 몰려듭니다. 그러나 대단한 사냥꾼 그 누구도 이리 왕 로보를 잡는데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저 ‘동물기’ 작가인 시튼 자신이 로보 사냥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시튼은 먹음직한 미끼에 독을 넣는 등 여러 가지 계책을 시도해보지만 그런 미끼나 함정을 미리 꿰뚫어보는 로보의 탁월한 지혜나 감각에 의해 역시 번번이 실패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다렸던 로보 대신 의외로 하얀 이리 브랭카가 올가미에 걸려듭니다. 그는 로보의 아내입니다. 그러자 그 후 로보는 슬프게 울며 진종일 브랭카만을 찾아다닙니다. 사람들은 거기에 착안해서 브랭카를 이용하여 가짜발자국을 임의로 만들어 놓습니다. 로보는 아내를 잃고 상심에 빠져 특유의 예민한 감각이나 판단력을 잃었던 것일까요. 로보는 브랭카의 가짜발자국을 따라가다가 결국 올가미에 걸려들고 맙니다. 그는 그것이 함정인줄 알면서도 브랭카와 함께 있고 싶어서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갔는지도 모릅니다.
그럴 것이 사로잡힌 로보는 사람들이 주는 물과 먹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양 누운 채 조용히 대초원 저쪽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내 아내 브랭카를 데려오라’는 시위였겠지요.
마침내 로보는 어느 날 먼동이 트기 전에 숨을 거둡니다. 로보의 시체는 생전시 그가 그렇게도 애타게 찾아 헤맸던 브랭카의 주검 옆에 놓여집니다. 그때 한 카우보이가 이렇데 중얼거립니다.
“너는 무척이도 이 녀석 옆에 오고 싶어 했었지. 네 아내가 네 옆에 와 있다. 이제 너희들은 다시 하나가 된 거야.”
적장(?)이지만 로보의 사랑은 감동적입니다.
그는 인간들을 향해 이렇게 혼잣말하며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 때문에 죽을 수 있다면 죽음조차도 행복한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한 몸’의 인연에 최선의 의무를 다했던 로보. 인간 우리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저 이리 왕 로보 앞에서 차라리 부끄러운 것은 아닐까요? 여하간 그렇게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을 수 있는 것도 고귀하지만, 진실로 고귀한 사랑은 대신 죽어줄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죄인(罪人)인 우리 인생들을 위해서 죽은 그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고한 사랑 말입니다.
브랭카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거짓발자국을 따라 함정으로 찾아가는 로보. 인생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거짓 재판을 따라 골고다 그 ‘함정’으로 찾아가는 예수 그리스도.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희생하는 대속(代贖)의 사랑. 그런 ‘신랑(新郞)’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수 있는 ‘신부(新婦)’는 또한 누구일까요? 저 로보는 알고 있을 법도 하지요?
신약성경의 원어인 헬라어에 의하면, ‘사랑’이 네 가지로 분류됩니다.
가족 곧 혈통적인 사랑인 ‘스톨게’.
우정 곧 친구 간의 사랑인 ‘필리오’.
남녀 간의 사랑인 ‘에로스’.
거룩한 하나님(神)의 사랑인 ‘아카페’가 그것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5:46-)
그렇습니다.
혈통적인 ‘스톨게’ 사랑이나 남녀의 ‘에로스’ 사랑은 사람이 아닌 로보조차도 저렇게 감동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 몹쓸 매국노나 수전노로 취급을 받던 죄인인 ‘세리’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 곧 교인들끼리만의 사랑은 이방인이나 이교도들도 끼리끼리 잘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그 이상인 ‘하나님의 사랑’ 곧 ‘아가페’를 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에 열리면, 악인도 선인도, 잘난 자도 못난 자도, 지극히 큰 자도 지극히 작은 자도, 우리의 원수나 은혜를 모르는 자조차도 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서로 사랑하며 서로 살려야 할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태복음5:43-)
그렇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자 하나님의 자비이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마음이자 큰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내 가족 내 핏줄’ 중심의 사랑인 ‘스톨게’나 ‘내 교회 내 직장’ 중심의 사랑인 ‘필리오’의 차원보다 더 거룩한 곧 구별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것입니다.
‘에로스’인 선남선녀의 순애보 사랑도 좋지만, 그런 사랑도 결국은 저 신부 ‘브랭카’가 신랑 ‘로보’를 죽음으로 인도한 것처럼 그것이 사랑하는 상대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실한 사랑은 아닙니다. 진실로 복이 있는 인연도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과 공존을 위해서는 그 이상의 ‘거룩한 사랑’에 열려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녀들이나 가족 간의 사랑이나 ‘한 몸’인 남녀 부부간의 사랑조차도 ‘주 안에서(in the Lord)’(에베소서6:1) 하라고, 곳곳에서 마치 접두사(接頭辭)처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로 살리는 길 곧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12월이 되었습니다.
일 년의 종말론은 12월입니다.
인생이나 지구촌의 ‘종말론’ 역시 '정해진' 12월입니다.
잘난 인생도 못난 인생도 13월을 사는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의 한 해가 또 이렇게 저문 것입니다.
그래서 때론 허무한 겨울의 세계가 빙하처럼 깊어갑니다.
그것은 소통이 아닌, 경직이자 차단의 의미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니 그래서,
십자로의 거리 이쯤에서 성탄 캐롤도 들려오고,
저쯤에서 구세군 냄비의 종소리가 들려오기도 합니다.
선행(善行)을 깨우는 그런 세모의 음성은 이 해가 가기 전에,
더 늦기 전에, 밀린 그것도 많이 밀린 ‘사랑의 빚’을,
종말 혹은 죽음이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도록
'너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더 갚으라는 하늘의 재촉처럼 들려오기도 합니다.
12월의 이 거리에서 지난 삶을 돌이켜보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다 더 이웃을 배려하지 못하고
보다 더 사랑하지 못한,
이기적으로 감정 중심으로 살아온
그래서 이미 죽었어야 마땅한 죄와 허물투성이의 인생인
저나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이자 동시에 빚입니다.
물론 주님께 진 구원 및 사랑의 빚이야 태산 같은 ‘일만 달란트’ 분량이어서
평생 갚아도 어림없는 그것이지만,
그래도 생색(?)이라도 내는 것이 뻔뻔해서는 안 될
‘빚진 자’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하는 그런 사람이나 그런 사랑을 각별히 기뻐하시고 각별히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진리가 오묘한 진리 됨을 우리가 스스로 맛보고 체득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동안 우리 스스로는 도무지 용서 내지 사랑할 수 없었던 ‘원수’나 ‘백년 웬수’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하고 기도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자나 대적하는 자나 저주 내지 박해하는 자의 심령이 열려져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진심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하늘의 햇살과 비를 ‘거룩한’ 수도원에도 아울러 ‘흉악한’ 교도소에도 동일하게 내려주시듯이 그렇게 온전한 마음으로, 자비로운 마음으로, 큰 마음으로 기도 및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내일이면 늦을 수 있습니다. 내일은 13월입니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악연조차도 13월을 사는 인생은 없습니다. 허무한 나그네 인생 여정에서, 피차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나 용서나 사랑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몫의 진실한 기도를 다했다면, 최선의 기도를 다했다면, 상대방이 그것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더라도 그것은 내가 상관할 문제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온전히 맡긴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상대방을 위해서 드린 그 기도나 용서나 평안이나 사랑이 되레 ‘나’에게 되돌아옵니다.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마태복음10:13)
따라서 반대로, 욕설이나 비난이나 저주를 퍼부었다면 그 집이나 그 사람이 그에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욕설이나 비난이나 저주가 되레 ‘나’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불이요 불의의 세계인 혀’(야고보서3:6)는 그래서 늘 조심해야할 그것입니다.
아울러 ‘지극히 작은 자’를 또한 ‘내 자녀’ 내지 ‘내 형제’처럼 ‘하나님의 마음’으로 아가페의 사랑을 할 수 있을 때 그런 사람이나 그런 사랑을 하나님이 각별히 기뻐하시고 각별히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사심 없는 그런 진실한 선행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그래서 땅에 떨어져버리고마는 과시적인 혹은 계산적인 그런 ‘우매한 선행’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하나님께 ‘빚진 자’의 자세로 겸허하게 우리가 찾아갈 수 있고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이웃’은 누구일까요?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일까요?
또한 우리가 먼저 용서하고 기도 및 사랑해야만 하는
우리의 ‘원수’나 ‘백년 웬수’는 누구일까요?
‘원수’는 결코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
그 역시 ‘이웃’입니다.
험악한 관계 내지 살벌한 관계가 되어버린 ‘이웃’이 바로 ‘원수’ 아닙니까.
70억이라는 모래알처럼 하고많은 지구촌의 사람들 중에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웃’이라는
‘어떤 인연’을 주신 분들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의외로 제한된 소수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런 ‘이웃’이라는 인연 내지 관계를
‘염소’처럼 이기적인 내 뿔이나 내 사랑이나 내 감정 중심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 곧 아가페 중심의 관계로
'양'처럼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작은 이웃을
'내 몸 같이' 살피는 선행을 베풀었던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이 있다”고 주님께선 또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태복음25:34-)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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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보기에, 현재 기독교는 세상의 편한 방법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세상과 마찰 없이 지내고 있다.
성령께선 신앙의 깊은 잠에 빠진 기독교에게
“이제 깨어나라!”라고 말씀하신다.
교회는 세상의 적대적인 태도를 두려워하여 움츠려들지만,
성령께선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다.-
*A. W. 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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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 안에 구원이 있고,
십자가 안에 생명이 있고,
십자가 안에 적과 대항하는 보호가 있으며,
십자가 안에 하늘나라의 축복과 기쁨이 숨겨져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 안에서 우리 마음이 힘을 얻을 수 있고,
영혼의 환희를 찾을 수 있으며,
십자가 안에서 높고 훌륭한 미덕과
거룩함의 완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구원과 영생(永生)의 소망은
십자가 외에는 그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를 따르십시오.
그리하면 당신은 영원한 생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토마스 아 캠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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