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할 수 있는 권력이나 자랑할 수 있는 영예는 경쟁에서 이긴 자, 한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일등, 한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물론 ‘선의의 경쟁’을 통해 승패나 우열을 가리는 스포츠 분야에서의 그 정정당당한 피땀은 치열할수록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그러나 총선(總選)이나 대선(大選) 같은 정치 분야에서의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치열함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런 감동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권력은 ‘부자지간(夫子之間)에도 나눠먹을 수 없는 것’이라던가요. 그래서 지난날의 선거전이 으레 그랬던 것처럼, 여야(與野) 후보들 캠프에서 나오는 ‘아니면 말고’ 식의 별의별 네거티브나 막말, 모략과 중상과 비방 일색인 마타도어(흑색선전) 등이 또 다시 난무하고 있는 금년의 대통령선거전을 지켜보면서, 미안하게도 ‘개들이 진창에서 서로 싸운다’는 의미인 ‘이전투구(泥田鬪狗)’라는 고사성어까지 또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저렇듯 오직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이긴 자만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은 자리나 권력을 차지한 자만이 정작 행복한 것일까요? 정작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일까요?
하긴 세상은 그것을 분명히 ‘성공’ 혹은 ‘출세’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생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한편으론 부러워하고 한편으론 시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런 세속의 가치나 질서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도 결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와 질서가 또한 있다는 것을 유념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 보다 긴 안목에 열려지면, 인생의 진정한 성공이나 행복은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와 질서에서 온다는 것을 명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친히 세상에 오신 삶의 목적이자 복음서 주제이자 아울러 오늘을 사는 모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할 핵심 구절일 수 있습니다.
-이방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10:42-45)
그렇습니다.
금세와 내세를 포함한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크고 높은 자는 예루살렘의 궁전에 있는 권력자도, 총독 빌라도도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궁전에 있는 최고통치자도 아니었습니다. 인생 우리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영원히 살리는, 진실로 크고 높은 자는 가장 낮은 자리인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곧 영원의 시작이었습니다. 부활이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서 증언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상상이나 픽션의 산물이 결코 아닙니다. 과학으로 우주(宇宙)에만 열려도 지구촌이라는 이 ‘좁은 세상’ 내지 ‘좁은 안목’이라는 한계 밖에 있는 ‘둘째 하늘’에는 무수한 행성이 존재한다는 신비를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렇듯이 영성(靈性)으로 내세에 열리면 사도 바울처럼 부활 및 ‘셋째 하늘’(고린도서12:2)’의 신비까지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자 칼뱅은 저 ‘셋째 하늘’을 ‘가장 높고 완전함을 상징하는 곳’이라고 풀이했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자리가 곧 셋째 하늘과 바로 통하는 가장 높고 완전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왕궁이나 청와대보다 더 높고 더 크고 더 영원한 생명의 자리가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 의하면,
공자가 젊은 시절에 노자를 불원천리하고 찾아가
지혜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노자(老子)가 공자에 주었다는 가르침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성덕(盛德)이 있으되 용모는 어리석게 보이는 법이요.”
그래서인지 노자는 최고선을 ‘어리석게 보이는’ 물의 세계로 봅니다.
‘상선여수(上善如水)’ 곧 ‘가장 높은 선은 물과 같다’는 명언이 그것.
동양 지혜의 압권인데, 노자는 그것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삶의 태도는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만물에 혜택을 주면서,
상대를 거스르지 않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나아가 노자가 언급한 물의 성품 세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물은 항상 유연성을 가지고 상대를 거스르지 않고 꾸준히 적셔준다.
물은 항상 겸허하게 상대의 낮은 곳으로 흘러가서 채워준다.
물은 약해 보이지만 또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기원전 6세기를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노자는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물의 성품’이라는 자연의 지혜를 통해, 역시 같은 시대를 이스라엘에서 살았던 구약성경의 선지자 이사야나 기원전 5세기를 살았던 선지자 스가랴처럼 장차 오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예언하신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럴 것이 하나님께선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 장차 세상에 흐를 ‘물’ 곧 ‘생수’의 발원지를 이렇게 분명하게 예언 및 계시해주셨으니까요.
-그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스가랴14:8)
나아가 저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이자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되어 세상에 오신 ‘생수’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증언을 들어봅시다.
-내가 주는 물은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永生)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4:14)
비유가 아닙니다. 삼인칭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체성 그 ‘자기선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유무를 떠나서라도 그 '물'이 그 ‘생수’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절반은 동해로(*동양으로) 절반은 서해로(*서양으로)’, 기원후 2천년 동안 흘러가고 흘러왔다는 것만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역사적 사실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예언 및 계시는 그만큼 두려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어리석게 보이는’ 물의 성품이자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아서 닮아가야할 삶의 영원한 생명성이나 필연성이 거기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실인즉 그렇게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살았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道)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 얻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1:18)
저 ‘미련한 것(foolishness)’ 곧 ‘모리아’는 ‘미련한, 어리석은, 우둔한’을 의미하는 ’모로스‘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한사코 낮은 자리 내지 섬기는 자리로 흐르는 ‘십자가의 도’ 곧 ‘그리스도의 도’ 곧 ‘복음의 비밀’이, 권력이나 재물이나 기득권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치열한 경쟁이나 ‘전쟁’을 일삼는 세상 사람들 눈에는 ‘미련하게, 어리석게, 우둔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인즉슨 그것이 되레 만물을 살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비밀한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12:2) (Ω)
-----------------------------------------------------------------
(♣)
-하나님께는 두 개의 보좌가 있다.
하나는 가장 높은 하늘에,
다른 하나는 가장 낮은 마음에.-
*D. L. 무디*
(♣)
그렇습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리는 진정한 보좌는,
가장 복이 있고 그래서 가장 소중한 보좌는
눈에 보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높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그곳이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자면,
바로 ‘셋째 하늘’이 되겠지요.
그런 ‘하늘’을 볼 수 있는 것 또한
눈에 보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겉사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가장 낮은 마음’, 거기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런 ‘하늘’을 아직 보지 못했다면,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아직까지도
‘낮은 마음’ 곧 ‘가난한 마음‘을 갖지 못한
잘못된 신앙인 혹은 교만한 신앙인일 수도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행인과 나그네 같은 허무한 인생 여정에서,
진실로 복이 있고,
진실로 큰 사람은,
‘가장 높은 하늘’을 향하여
‘가장 낮은 마음’으로 사는,
과연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우리 모두 그런 ‘그리스도 인격’이 될 수 있기를! (Ω)
----------------------------------------------------
(♣)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우리는 새로운 온전함(wholeness)을 발견해 나갈 수 있다.
우리는 온전한 삶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회복을 필요로 하며,
또한 우리 자신들과 이 세계 속에 죄(罪)가 가져온
모든 깨어짐(brokenness)들을 치유할 하나님의 회복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역사의 목표는 새로운 창조,
즉 우리 인생의 모든 깨어진 것들을 제거하고
모든 것들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 영원한 의의(*生命)가 부여되며,
역사는 영광스런 종말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제렘 바스(Jerram Barrs)*
'영성 편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을 위하여 (0) | 2012.12.31 |
---|---|
'예수 없는 성탄'이 되지 않게 하소서 (0) | 2012.12.24 |
'한 손에 성경을, 한 손에 신문을' (0) | 2012.12.10 |
'이리 왕 로보'의 사랑과 '빚진 자'의 사랑 (0) | 2012.12.03 |
'욥'의 신앙의 핵심 (1) | 2012.1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