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했던 한 해도 이렇게 저무는군요.
하루의 해는 동녘 하늘에서 뜨고 서녘 하늘로 집니다.
그렇듯이 한 해의 해도 동녘 하늘에서 뜨고 서녘 하늘로 지고,
한 인생도 동녘 하늘에서 뜨고 서녘 하늘로 지는 것이겠지요.
뜨고 짐이 ‘한 하늘의 일’이고 그래서 묵은 해의 끝 내지 종말이
또한 새해의 시작이 되는 것이고,
한 인생의 슬픈 죽음이 또한 영원의 기쁜 시작이 되는 것이겠지요.
피조물인 우리 인간의 뒷머리에는 눈이 없습니다.
앞머리에만 눈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볼 수는 있습니다.
다만 뒤를 돌아보려면 머리 전체의 방향을 움직여만합니다.
그것은 지난 삶에 대한 깨달음이나 뉘우침을 포함한
모든 후회나 참회나 회개가 그런 것처럼 보다 진지하게 머리 전체로
혹은 삶 전체로 성찰해야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겠지요.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태복음4:17)
그렇습니다. ‘천국’이라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해를 맞이하려면 늘 먼저 ‘회개’가 필요합니다.
기존의 삶이나 타성이나 가치관의 ‘방향을 바꾼다’는 의미인 저 ‘회개(悔改)’ 없이는 새로운 천국을 맞이해도, 새해를 맞이해도, 새 정부를 맞이해도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아무런 유익도 발전도 성숙도 없습니다. 그렇고 그런 과거의 구태가 반복될 뿐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처럼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려면, 자기 감정이나 이익이나 기득권을 고집하거나 보수 혹은 진보 등 자기 사상이나 이념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등의 이기적인 집착이나 타산이나 각종 죄악이나 탐욕의 과거적 행태를 먼저 진지하게 머리 전체로 혹은 삶 전체로 성찰하며 ‘회개’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럼 우리의 지고한 이상향이자 소망인 ‘천국’ 곧 빈부귀천이 공존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를 이 땅 위에 구현하기 위해서, 자기반성을 위한 진정한 회개는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거창한 이론이나 현학적인 학설이나 논설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렇듯이 한 마디로, “자기를 부인하고”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he must deny himself)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태복음16:24)
‘제 목숨’만이 아닙니다. 이기적인 제 명예도, 권세도, 부귀영화도 다 그렇습니다. 가정의 화목을 위한 관계도 그렇습니다. 정치적 승자도 패자도, 경제적 빈부(貧富)나 지역, 계층, 세대 간의 모든 기득권자도 기실권자도 다 그렇습니다. 자기 위치에서 겸허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거기서부터 비로소 우리의 소망이 발아되고 성숙되고 구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다 나은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마음으로 감당해야할 ‘내 몫’의 그리고 집단인 ‘우리 몫’의 응분의 노력이나 액션이나 변화는 목하 풀어야할 큰 숙제로 남습니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李珥) 선생.
어느 날, 선생에게 누이의 아들 그러니까 생질이 되는 홍석윤(洪錫胤)이가 찾아와서 이런 부탁을 합니다. 세계적인 경제 불황의 여파로 청년실업률이 높은 그래서 사회문제가 되어 있는 오늘 우리 시대의 청년들처럼, 당시 그 역시 고민하는 ‘백수’였던 모양입니다.
“이렇다하게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자니 마음이 어지럽습니다. 경계로 삼을만한 말씀을 좀 주십시오.”
그래서 선생이 써주었다는 글「증홍생석윤(贈洪甥錫胤)」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병이 있는데, 하나는 혈기(血氣)의 병이고, 하나는 지기(志氣)의 병이다. 혈기의 병은 의원에게 묻고 약을 구하여 외물(外物)로 치료할 수 있고, 지기의 병은 자각하고 자수(自修)하여 마음(內心)으로 치료할 수 있다.
외물로서 치료하는 것은 그 권한이 남에게 있고, 마음으로 치료할 수 있는 것은 그 권한이 나에게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권한이 남에게 있는 혈기의 병은 치료하려고 애쓰면서도, 권한이 나에게 있는 지기의 병은 조금도 고치려고 노력을 하지 않으니 괴이한 일이다.-
그렇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것도 그 권한이 남에게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증오하고 시기하던 자기를 부인하고 사랑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연이은 실패와 패배 등으로 인해 낙심 내지 절망 일색이던 자기를 부인하고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는 것도 그 권한이 남에게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대기업 공채 지원율은 수백대 일에 달하지만, 중소기업은 여전히 구인난에 허덕이며 90% 이상이 “마땅한 사람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괴이한’ 시대에서, 눈높이를 보다 겸손하게 낮추는 그런 권한 역시 남에게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권한이 바로 ‘나에게’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괴이한’ 것은 고학력자가 될수록 자기를 주장하는 머리나 아집은 커져도, 자기를 부인하는 능력이나 권한은 되레 작아지고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신체의 병은 고치려고 불원천리하고 찾아다니며 병원과 의사와 ‘외물’에 목을 걸고 매달리면서도, 그 치료의 권한이 바로 자기에게 있는 신체의 병보다 되레 더 큰 자기 마음의 병은 조금도 고치려고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들은 예나 지금이나 실인즉슨 자기에게 자기가 속고 사는 모순의 존재인가 봅니다.
물론 그것이 청년실업에 관한 문제만은 아닙니다. 모든 분야에서 남을 고치고, 사회를 고치고, 국가를 고치겠다고 나서는 ‘유식한 사람들’은 많은데, 먼저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를 고치고자 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드문 오늘의 세태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고린도전서1:19-20)
그러니까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지 못하는 ‘세상의 지혜’나 학문은 아무리 해박하고 거창해도, 그것은 ‘우리’라는 공동선이나 공존의 가치를 살릴 수 없는 ‘미련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고의 공동선인 ‘하늘나라’의 가치와 그 구현을 위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각종 스트레스 같은 자기 마음의 병도 결국엔 몸의 병이 된다고 그러더군요. 그것이 임상적인 발병 상태는 아니더라도, 우리 인간의 애증 탐욕 정욕 원망 불안 대립 반목 등 모두 자기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상대방을 이기고 그래서 지배하고 싶고, 자기 자존심이나 비위에 거슬리는 말은 비록 옳은 말이라고 해도 듣기 싫은 ‘괴이한’ 심사 등 모두가 철저하게 이기적인 자기중심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때론 가해자로 때론 피해자로 살아갑니다.
성경은 그런 마음의 상태를 조상으로부터 연유되는 원죄 및 자범죄(自犯罪) 등의 죄악으로 인해 이미 타락해져있는 상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회개’와 ‘자기부인(否認)’을 통해서만 ‘하늘나라’의 보다 나은 선, 보다 나은 성숙, 보다 복이 있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실인즉 ‘자기부인’을 할 수 있는 그만큼 자기 마음이 커집니다. 작은 것에 감사 및 자족할 수도 있고, 겸손할 수도 있고,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섬길 수도 있습니다. 행복이나 참 복은 거기서 오는 것이 아니던가요?
따라서 ‘자기부인’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부터가 ‘밴댕이 소갈머리'처럼 좁고 얕아서 스스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설령 세상의 부귀영화와 일락을 혼자 다 누리며 사는 ‘부자’다쳐도 말입니다. 그런 사람에겐 뒷머리에도 눈이 있어야겠지요?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비난에 미소로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의 감정을 부인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과 여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매사에 그렇습니다. 상대방을 고치기보다는 먼저 나를 고쳐버려야 나도 우리도 잘 삽니다. 구조나 제도권의 모순을 고치기보다는 먼저 ‘나의 모순’을 고쳐버려야 사회가 잘 됩니다. 내 '괴이한' 모순을 고칠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나아가 제도권의 모순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욕심이나 탐욕을 '부인하고' 비워버리면, 섬겨버리면, 죽어버리면 더 이상 다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감정도 없습니다. 그러나 말이 없다고 해서 말씀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크든 작든 그가 감당하고자 했던 희생의 ‘십자가’가 있었다면 그 십자가가 대신해서 더 크고 더 감동적으로, 때가 되면 말씀해주는 하나님의 영(靈)의 비밀과 필연의 섭리가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그렇듯이, 세상이나 국가의 모든 부침이나 흥망이나 개혁이나 변화나 성숙 역시 한계를 사는 우리 인간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무신론자들 곧 유물론(唯物論)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인류의 최대의 실험’이었던 '소비에트제국의 멸망'이 그것을 생생하게 실증해줍니다. 그것은 오직 ‘천국’ 곧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의 나라에서 비롯됩니다. 사람이 임의로 만든 수원지가 물을 모을 수도 있고 내보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비는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4:23)
어떻게 지키라는 것인가? 총칼로 지킬 수도 없는 ‘내 마음’ 아닙니까? 때론 “내 마음 나도 몰라”가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명쾌한 해답처럼 오직 ‘자기를 부인’할 수 있을 때만이 자기 마음을 지킬 수 있는데, 그것이 또한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한계를 사는 인간 내 의지나 내 노력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숙제는 '네 스스로의 의지로 깨어 있으라'가 아닙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누가복음21:36)입니다.
나아가 저 ‘지키다’ 곧 히브리어 ‘나차르’는 ‘금하다, 베풀다, 준행하다’는 의미도 함께 가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그 말씀을 중심으로 금할 것은 금하고, 베풀 것은 베풀고, 준행할 것은 준행하는 삶이 금세와 내세의 영원한 생명으로 통하는, 참 복이 있는 길이자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라디아3:8-)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현재형으로 늘 떠있는
‘의로운 해(the sun of righteousness)’-(말라기4:2)입니다.
우리에게 어두운 밤이 오는 것은
우리가 아니 지구촌이 흔들리며 자전(自轉)하기 때문이지,
‘진리의 해’가 돌아선 때문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겨울 한파가 몰아닥치는 것은
우리가 아니 지구촌이 흔들리며 공전(公轉)하기 때문이지,
‘사랑의 해’가 돌아선 때문은 아닙니다.
새해에 ‘의로운 해’의 복 많이들 받으소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더욱 사랑하며 살릴 수 있도록,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복’ 많이들 받으소서!
하늘나라의 참 복 많이들 받으소서!
그래서 우리를 인생으로 잠시 세상에 보내주신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나라와
그 공의와 그 사랑과 그 평화가
이 땅 위에 더욱 기쁘게 이루어질 수 있기를!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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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한 것은 자신의 노력을 의지하던 상태에서
자신에게 완전히 절망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상태로
변화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
한 그리스도인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태어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실천하신
완전한 순종의 삶을 자기 역시 어떻게 해서든지
살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닮게 해주신다는 사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이지요.-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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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주님.
제가 가는 곳마다
당신의 향기를 퍼뜨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제 마음을 당신의 영(靈)과 생명으로 채워주소서.
제 존재를 온전히 껴안고 차지하시어
제 삶이 당신의 생명을 비추게 해주소서.
저를 통하여 빛이 되시어
제가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제 안에 깃들인 당신을 느낄 수 있도록
제 안에 머무소서.
사람들이 저를 보지 않고
제 안의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와 함께 머무시어,
제가 당신의 빛으로 빛나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이 제 빛으로 밝아지게 하소서.
오, 주님!
모든 빛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아주 희미한 빛이라도
제게서 나오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통해 비추시는 것입니다.
제 입이 삶의 모범과 함께
당신을 찬미하게 하소서.-
*마더 테레사와 ‘사랑의 선교회’
수도자들이 매일 드리는 기도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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