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흐르고 강이 흐르는 그런 물결 소리에서
인생이 흐르는 깊은 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가장 뛰어난 선은 물과 같다(上善如水)’지만, 한편으론
그런 물의 흐름도 듣는 귀에 따라 그 소리는 다양한 것 같습니다.
그럴 것이 조선의 후기의 문인이자 실학자였던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 나오는,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 건넌 기록(一夜九渡河記)’에 보면, 그는 강이 흐르는 물결 소리에서 인생의 애환이 흐르는 깊은 영음(靈音) 혹은 모음(母音)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산 사이에서 흐르는 강물’의 물결 그 흐름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그것이 때론 인생의 성난 소리 같기도 하고, 때론 구슬픈 소리 같기도 하고, 때론 부르짖으며 고함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때론 원망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때론 ‘물귀신과 하수(河水)의 귀신들이 서로 다투어 사람을 엄포하는 듯하는’ 두려운 소리 같이 들리기도 했다는 기록들이 그것입니다.
나아가 구도자(求道者)이기도 했던 연암은 눈이나 귀로 나타난 현상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강물 소리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라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에는 그것이 ‘뭇 개구리들이 다투어 우는 소리’ 같이 들리고, ‘분노한 마음’에는 그것이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로 들리지만 강물 그 속은 마냥 잔잔하다는 것입니다.
-아, 나는 이제야 도(道)를 알았도다. 마음이 평안한 자는 귀와 눈이 누(累)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만 더욱 밝혀서 큰 병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
옛적에 우(禹)가 강을 건너는데, 누런 용(龍)이 배를 등으로 들어올려서 극한의 위경에 처했다고 한다. 그러나 죽음조차도 각오한 마음을 가지자 상대가 용이든 지렁이든 혹은 그것이 크든 작든 간에 관계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사백여년 동안 망국(亡國)의 한을 안고 ‘신구약중간사’를 살아온 이스라엘.
바벨론과 페르샤 그리고 헬라와 로마로 이어지는 강대국의 압제 아래서 곤욕스럽게 살아온 이스라엘.
현실이 어둡고 고통스러운 그만큼 선지자들의 말씀을 통해 구약 성경 곳곳에 예언된 ‘세상에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소망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마침내 ‘세상에 오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
그러나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구원과 독립을 기대했던 제자들의 소망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허무하게 너무도 허무하게’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맙니다. 죽어버린 것입니다. 물거품처럼 모든 것이 다 끝나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나라’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시작을 위해서 무엇이 먼저 필요한 것일까요?
자본? 대형건물? 인력 동원? 다 아닙니다.
세상을 이기고, 죽음조차도 이긴 ‘그리스도의 평화’였습니다.
그것을 믿음에서 오는 심령의 문제였습니다.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좌절도 큰 것.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오는 극한의 좌절과 허무와 절망을 앓으며 한편으로 유대인들이 추종자들을 색출하여 다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주신 첫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Peace be with you!)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한복음20:19-20)
저 ‘평강(peace)’ 곧 헬라어 ‘에이레네’는 신약성경에 ‘평화, 평강, 평안’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같은 단어의 의미입니다. 저 ‘그리스도의 평화’는 한계를 사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인생의 고통이나 고난, 죽음마저도 이긴 자만이 줄 수 있는, 진실로 ‘세상을 이기는 평화’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인생이라는 ‘바다의 거친 바람이나 풍랑마저도 말씀 한 마디로 잔잔하게 하시는’ 그런 평화입니다. ‘부활이자 생명’이 주는 영원한 평화인 것입니다.
물론 부활은 세상의 이론이나 과학이나 이성으로 풀어지는 문제는 아닙니다. 영성(靈性)의 문제이자 믿음 곧 신앙의 문제입니다. 이성이나 과학으로 풀어지면,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도, 창조의 신비도, 그리스도의 비밀도 되레 있어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인생의 내일이나 내세의 신비나 비밀도 희망도 없어집니다.
‘오아시스’에 대한 비밀이나 신비나 희망이 없는 세상은 되레 ‘사막’처럼 인생들의 삶 내지 마음 자체가 스스로 삭막해질 뿐입니다. 이성이나 과학으로 풀어지는 ‘기계’라는 메커니즘에는 신비도 생명도 없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존엄성이나 절대성을 가지는 것은 거기 ‘영성의 신비’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 중심인 성경은 허황한 신비주의를 조심 및 경계하고 있지만, 그러나 초월적인 ‘하나님의 신비’ 곧 ‘영성의 신비’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용한 상기의 말씀에도 부활의 신비이자 그리스도의 신비는 명징하게 구현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죄다 굳게 잠가두었습니다. 누구에게 문을 열어준 적도, 드나든 사람도 분명히 없었는데, 예수께서 홀연히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말로 귀신처럼, 혼령처럼 홀연히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그 분은 혼령이 아니었습니다. 못 자국과 창 자국 등 거룩한 희생의 상흔이 적나라하게 배인 육신의 손과 옆구리를 친히 보여주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전자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고, 후자는 ‘사람의 아들’의 모습입니다.
저 신비 역시 이성으로 풀리는 문제가 아닙니다. 역시 영성의 문제이자 신앙의 문제입니다. 실인즉 인생 우리는 내일의 문제도 전혀 모릅니다. 따라서 내일의 문제 역시 영성의 문제이자 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비밀한 소관이자 섭리 아래 있다는 것. 따라서 내일의 문제이든 부활의 문제이든 또는 금세의 문제이든 내세의 문제이든 그 모든 비밀에 열려질 수 있는 소망의 길은, 우리 마음 안에 그 문제를 하나로 풀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인 그리스도와 그의 평화를 간직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금세에서 살아도 살고, 금세에서 죽어도 내세에서 사는 숙제와 신비를 확실하게 풀어준 ‘그리스도의 평화’.
그런 ‘그리스도의 평화’를 간직한 제자들은 그 후 ‘죽음조차도 각오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에 더욱 힘쓰다가 마침내 주님께서 약속하신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고, 선교현장으로 나아가 사역하다가 처참하게 순교당하는 일까지도 찬미하며 감수합니다. 세상도 죽음의 두려움마저도 담대하게 이긴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저 연암의 글처럼, ‘죽음조차도 각오한 마음을 가지면 상대가 용이든 지렁이든 혹은 그것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간에 관계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숙제는 저 ‘죽음조차도 각오한 마음’이 어디서 절로 우러나올 수 있느냐, 그것이겠지요. 인간의 의지? 의지는 인위적인 것입니다. 순리적인 것은 평화입니다.
물론 세상의 현자나 영웅이나 호걸들도 ‘평화’를 설파하고 강조합니다. ‘로마의 평화’ 곧 ‘팍스 로마나(Pax Romana)’나 ‘아메리카의 평화’ 곧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를 주창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말을 바꾸자면 한 마디로 무력이나 자본의 평화 같은 제국주의적 평화를 의미하는 것 아닙니까. ‘내 손, 내 주먹 아래서 평안하라’는 이기적인, 패권적 평화인 것입니다.
1963년 6월 10일. 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대학교 학위수여식에서 아래와 같은 명연설을 했던 적이 있었지요.
-이 자리를 빌려 나는 그에 대해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을 너무나 늦게 자각하는 문제이자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해 거론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평화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평화, 우리가 찾아야 하는 평화는 어떠한 것일까요?
그것은 미국의 전쟁무기로 세계를 강압하는 팍스 아메리카나를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노예상태에서의 안전을 주는 그런 평화도 아닙니다. 나는 진정한 평화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지구상의 생명을 살리고 사람들과 국가들을 성장시키는 그런 평화 말입니다.-
‘지구상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진정한 평화’라는 것은 정작 올바른 갈파이자 거론입니다. 그것은 또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 케네디 대통령이 보여준 ‘손과 발’에는 거룩한 십자가의 상흔이 전혀 없었습니다. 못 자국도 없었고, 창 자국도 없었습니다. ‘진정한 평화’를 웅변했지만, 그의 ‘손과 발’에는 자본과 전쟁무기의 자국만 있었습니다. 제국주의적 평화이자 인위적인 ‘팍스 아메리카나’의 범주를 전혀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경을, 법령을 통해 교육 현장인 학교에서부터 제한시킨 그의 이성적인 정책 자체부터가 ‘진정한 평화’의 신비를 모르는 모순적 소이였던 것이겠지요.
여하간 저 연설을 했던 5개월여 후, 패기만만했던 케네디 대통령은 암살당하고 맙니다. 괴한의 흉탄에 쓰러진 것입니다. 그는 결코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케네디의 평화’나 ‘아메리카의 평화’도 정답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 세기적인 비극 자체를 통해, 그는 ‘진정한 평화’는 오직 ‘그리스도의 평화’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웅변하고 갔는지도 모릅니다.
십자가의 고통 그 거룩한 상흔을 ‘손과 발’에 여전히 간직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여전하게 성경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오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크고 작은 우여곡절에 매여 때론 염려하고 때론 걱정하며 불안해하고 때론 두려워하는, 그래서 ‘문을 잠그고 있는’ 우리의 집안 가운데 또는 우리의 심령 가운데 여전하게 홀연히 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에게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인간의 한계를 살다보면, 인생 여정에 크고 작은 우환질고(憂患疾苦)나 좌절이나 낙담이나 두려움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평안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모든 풍파를 능히 이기는 초월적이고 아울러 내재적인 그래서 죽음조차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나의 평안’ 곧 ‘그리스도의 평안’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보다시피 이렇게 ‘죽어도 사는’ 내세 곧 부활의 세계는 있고, 하늘나라는 있다는 것입니다. 지고한 그러나 조용한 증언의 현장이자 웅변의 현장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my peace)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14:27)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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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심에 관한 계시는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훨씬 더 깊은 신비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임재를 우리의 능력과 기쁨으로 구하게 하신 은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을 받았을 때,
그리스도의 많은 제자들은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뜻을
다 이해하는 것이 지극히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실로 그들의 매일의 삶에서 실제적인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영적 생활의 다른 면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신령한 실재로 받아들이는 믿음과
매순간, 우리에게 이것을 진리로 만들어주시는 성령님을 의뢰하는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신 불변하는 자이신 것이 틀림없는 사실인 것처럼,
그분이 자신의 임재(臨在)를 의지하는 모든 종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앤드류 머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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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땅에서 우리가 사는 짧은 삶과 관련된 문제들이 얼마나 크고 절박한 일이든,
그것은 죽음과 광대한 천국의 초시간적이고 측량할 수 없는 관심사들에 비하면 너무나 작아진다.
탐구하는 젊은이들에게 이 땅에서의 삶은 얼마나 길어 보이는지!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그 삶이 얼마나 빨리 달아나는 것 같은지!-
*시들로우 백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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