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와 그린란드에 사는 에스키모들은 스스로를 ‘이뉴잇’이라고 부르는데, 그 말은 곧 ‘사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문명이 들어가서 열려지기 이전까지는, 세상에서 ‘사람’은 오직 자기들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물 안 개구리들’이 이 세상에서 ‘개구리’는 오직 자기들뿐이라고 생각했다는 경우가 되겠습니다.
물론 신앙인인 우리들 역시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온전하게 열려지기 이전까지는, 그런 식의 어리석은 독선이나 무례한 교만 내지 착각에 빠지기 마련이니까 저들만 탓할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1818년 8월 10일.
영국 극지탐험대는 대장인 존 로스 선장의 지휘 아래 그린란드의 에스키모인 ‘이뉴잇’들과 처음으로 대면합니다. 물론 이뉴잇들은 낯선 영국인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외계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이뉴잇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며 이렇게 말할 뿐입니다.
“당장 여기서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너희를 죽일 수도 있다.”
당시 존 로스 선장의 통역은 존 삭셰우스라는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는 남 그린란드 출신으로 서툴게나마 영어 통역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일촉즉발의 살벌한 대치 국면에서 ‘평화의 중보자(?)’ 역할을 감당해야했던 그는 주목할만한 재치를 순간적으로 발휘합니다. 자기가 들고 있던 칼을 갑자기 땅바닥에 던져버린 것입니다.
자기의 무기를 던져버리는 그런 무장 해제 행위에 오히려 어리둥절해진 이뉴잇들은 이윽고 그 칼을 집어들더니, 자기들의 코를 잡고 특유의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그때 통역자인 삭셰우스도 그들을 따라 똑같은 동작을 취합니다. 겸손하게 그들을 섬기며 그들과 동화된 것입니다.
그때가 관계 개선에 가장 어려운 고비였는데, 그렇게 고비를 넘긴 이후 저 두 ‘문명과 문명의 만남’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중보자 한 사람의 지혜로, 이뉴잇들의 마음이 열린 것입니다.
연장자 이뉴잇이 삭셰우스에게 다가와 그가 입은 면셔츠를 손으로 만져보며, 이런 옷은 무슨 동물의 가죽으로 만드느냐고 묻는 등 호의를 보이다가 이내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들은 달에서 왔소? 아니면 해에서 왔소?”
그렇게 대화의 실마리가 풀리면서, 삭셰우스는 그들에게 영국 장교들을 소개하는데 성공합니다. 그 후, 영국인들이 이뉴잇들에게 거울이나 시계 등을 보여주자 이뉴잇들은 무척 신기하게 여기면서, 시계를 “먹을 수 있는 것이냐?”고 묻기도 합니다. 여하간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세상에 그리고 지도상에 공개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검(劍)은 곧 ‘힘’이자 ‘무력’이자 때론 ‘폭력’으로 통합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방어를 위해서라도 때론 ‘칼’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실인즉 인간은 누구나 ‘힘’이 있기를 원하고 그런 사람을 즐겨 추종합니다. 정치권력이 그렇고, 금력(金力)이라고 불리는 재물의 힘이 역시 그렇고, 심지어 종교조차도 세속화되면 될수록 그것이 곧 지배 권력으로 통합니다. 따라서 주먹이나 칼, 총 등의 완력이나 무력도 우리 인간들이 선호하는 그런 ‘힘’의 일종입니다.
북한이 ‘문명을 받아들이며’ 개화 및 개방으로 나오기는커녕 여전하게 적대적 태도를 보이며, 최근엔 미사일 발사를 통해 시위하고 나아가 핵실험까지 운운하는데 그런 우리 민족의 이슈에도 저 삭셰우스처럼 재치 있고 지혜로운 ‘평화의 중보자’가 어서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민족이나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우리 개개인의 인간관계에서도 어서 나타나야할 오늘의 ‘평화의 중보자’는 누구일까요?
‘수제자 베드로’ 같은 인간형에게서 그것을 기대해 볼 수 있을까요?
그러나 ‘오순절 성령세례’(사도행전2:)를 받고 하늘나라의 신비와 힘(能力)에 대해 활짝 열려지기 이전의, 그러니까 온전하게 거듭나기 이전의 베드로에게서는 그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럴 것이 그는 위기에 직면하자 ‘칼’을 유일한 힘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휘둘러 무력으로 행사했으니까요.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쪽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한복음18:10-11)
3년여 동안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로 살았던 베드로가 왜 저렇듯 주님의 뜻과 전혀 배치되는 어리석은 짓을 감행했을까요?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께서 미리 말씀하셨던 아래의 말씀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사료됩니다.
-(예수께서)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劍)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누가복음22:35-38)
물론 저 말씀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난해한 부분으로 통합니다.
“전대(purse)와 배낭을 소유하고, 겉옷을 팔아 검(sword)을 사라”는 말씀이 과연 여자적(如字的) 표현 그대로 ‘돈주머니’나 ‘배낭’ 자체를 소유하고, 무기인 ‘칼’을 사라는 의미였을까요?
아닙니다. 저 베드로의 ‘만용’을 통해 그런 문자적 의미가 아니었다는 것이 오히려 증명이 됩니다. 베드로는 구약에 기록된,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이사야53:12)고 한, 메시야에 관한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이 과연 이루어지자 또한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상기했을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검을 들어 대적할 때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긴 모시는 ‘주님’ 내지 스승의 위기를 외면하는, 의리 없는 비겁한 제자의 모습보다는 저런 열정이나 용기가 인간적으로 더 나을 수 있을 법도 합니다. 여하간 그래서 세상의 ‘주군’을 모시는 부하 내지 신하의 세계가 으레 그런 것처럼, 용감하게 대적해서 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용기가 아닌 만용이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뜻’이지 ‘주님의 뜻’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은 “이것까지 참으라”(누가복음22:51)였습니다. 그럴 것이 ‘인간의 손’이 먼저 나가면 ‘하나님의 손’이 침묵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일’이 먼저 나가면 되레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존 칼뱅은 이렇게 언급했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이상의 행동을 감행할 때는 우리의 열정이 되레 망신으로 끝나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고.
우리의 열정이나 만용이나 분노 같은 감정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상으로’ 재물이나 높은 자리나 색욕 등을 포함한 각종 탐욕이나 집착에 빠지면 그 탐욕이나 집착이 결국은 자기 망신으로 끝나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실인즉 ‘주 안에서’ 벗어난 세상적인 욕심이나 혈기 등 그 모든 것이 결국엔 우리 자신이나 가정이나 사회를 불행으로 인도하니까요.
인생 개인의 문제이든, 가정의 문제이든, 남북 간의 동족의 문제이든, 국가 간의 문제이든, ‘인간의 손’이 아무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피땀을 흘려도 ‘하나님의 손’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기존의 성공조차도 결국은 ‘풀의 꽃과 같이’ 허무하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요? 무위 아니던가요?
따라서 “전대와 배낭을 소유하고, 검을 사라”는 저 말씀은 다가올 환난과 박해의 때 곧 ‘어두움의 권세의 때’(누가복음22;53)를 구체적으로 대비하고,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영적 무장을 하라’는 메타포 곧 은유적(隱喩的)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고 ‘영(靈)의 사람’으로 거듭난 이후, 더 이상 인간의 손을 들어 ‘세상의 칼’을 사지도 않고, 그것을 교만하게 휘두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합니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니라.-(베드로전서5:5-)
그렇습니다. 우리의 염려도, 우리의 혈기도 다 주께 맡겨버려야 합니다.
전적(全的) 맡김. 그래야만 되레 주님의 손에 의한 전적 돌보심이 이루어지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성급한 인간 우리의 어설픈 지식이나 뜻이나 고집이나 성정이나 만용 등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나 일을 그르치고 있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한편, 사도 바울은 ‘세상의 검’과는 또 다른 ‘하나님(성령)의 검’의 세계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에베소서6:12-)
그러니까 신문에 나오는 인간의 혈과 육의 세속사(世俗史)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영(靈)이신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를 보라는 것입니다. 인생사나 세상사는 실인즉 인간의 배후에서 교묘하게 미혹 및 충동질하는 ‘악의 영(惡靈)’과 ‘하나님의 영(聖靈)’의 영적 전쟁무대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교묘하게 괴롭히는 악한 영들 곧 사탄의 세력을 당장에 소탕해버리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고, ‘추수 때’ 곧 ‘종말의 때’까지 “알곡과 가라지를 함께 자라도록 그냥 두라”고 하신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대해 인간 우리는 때론 이해할 수 없어 회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숙제로 남겨두신 것은 또한 숙제로 ‘받아들이는’ 겸손한 믿음도 필요합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과 악령을 구별할 수 있고 그래서 악령을 대적해 이길 수 있는 무기인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은 주셨다는 그것입니다. 실인즉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성령이나 악령의 역사를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 혼란이나 기복신앙이나 맹신에 빠져 뒤죽박죽이 됩니다. 그런 사람이나 단체의 신앙은 예나 지금이나 오래 가지 못합니다. '말씀'이라는 ‘반석’ 위에 신앙의 집을 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총이나 칼보다 더 무서운 힘을 가진 게 펜(pen)이다”는 말이 있지요? 그렇듯이 ‘말씀’의 힘은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펜보다 더 무서운 힘이 말씀에 있고, 펜보다 더 영원한 생명이 말씀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믿음은 죽은 후에 천국에 가자는 것만도 아닙니다. 우리가 현실을 사는, 세상을 이기며 사는 구체적인 힘이자 능력이자 축복 자체인 것입니다.
인간 우리에게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은 우선적인 생필품입니다. 그러나 입는 ‘겉옷’조차도 팔아서 혹은 사회적 신분일 수도 있는 그 '겉옷'조차도 팔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 때 오히려 ‘말씀’이 우리에게 더 좋은 ‘겉옷’을 준다고 성경은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물론 ‘받을 상’이라는 그 축복은 꼭 금세에서만 받는 것은 아닙니다. 금세에서 받지 못한 사람에겐 내세에서 더 크게 주어질 것입니다.
‘영의 사람’으로 거듭난 이후에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높이 들었던,
믿음의 사도이자 순교의 사도인 베드로의 고백을 다시 들어봅시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베드로전서1:24-25)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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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주시고,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그리고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라인홀드 니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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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때때로 남의 결점을 파헤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돋보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결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총명하고 선량하면 할수록 남의 좋은 점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짓궂으면 그럴수록 남의 결점을 찾습니다.-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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