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사회적 약자들에게 베푸는 자가 받는 '복'

이형선 2013. 2. 4. 10:36

 

   최근의 기사에 의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30개국 중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수준이 맨 꼴찌인 멕시코의 바로 다음번인 29위이더군요. 2009년 기준의 통계이긴 합니다만, 여전히 하위그룹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새 정부가 인수 준비를 하면서부터 사회복지가 주요 이슈 내지 화두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빈부의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 정부 차원에서도 당연히 복지 수준을 높이고자 노력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상대적으로 많이 소유한 부자들이 사회적 약자 내지 작은 자들에게 베푸는 자가 받는 복의 비밀을 알고, 어려운 이웃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의식에 보다 성숙하게 열려지는 사회분위기나 풍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중국 전국시대 제(齊)나라 위왕의 작은 아들인 전영의 서자로 태어났고,

   그 후 버려진 신세가 되어 죽은 듯이 숨겨진 채로 성장해야만 했던 맹상군(孟嘗君).

   그러나 그는 훗날 제나라 재상이 되어 백성들에게 덕치를 베풂으로써 전국시대 ‘4군(四君)’ 중 한 사람이 됩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어느 날.

   그가 아버지에게 감히 그러나 정중하게 이런 충언을 드립니다.

   “아버님께서는 제나라 재상이 되신 후 지금까지 세 왕을 섬기셨습니다. 그동안 제나라는 한 치의 영토도 넓히지 못했는데 아버님께서는 억만금의 재산을 모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버님 곁에는 단 한 명의 현자(賢者)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버지 전영도 그릇은 큰 사람이었던가 봅니다. 그런 고언에 노하지 않습니다.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서자 출신인 맹상군을 되레 가문의 후계자로 세웁니다.

 

  

   설(薛) 땅의 영주가 된 맹상군은 그 후, 큰 부자인 그의 재산을 풀어 식객들을 불러들입니다. 선비들은 물론이고, 죄인이든 약한 자든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대접을 해줍니다. 그러자 같은 식객들조차도 어떤 사람들은 죄인이나 천출들까지 극진히 대접하는 맹상군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생각할 지경이었습니다.

 

 

   어느 날.

   진나라가 제나라의 맹상군에게 방문을 강요하자,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제나라는 하는 수 없이 맹상군을 진나라로 보냅니다. 맹상군은 결국 거기서 사로잡히고 맙니다. 현자를 미리 죽여서 후환을 없애고자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그때, 동행했던 일행 중 왕년에 개도둑이 있었습니다. 맹상군의 식객으로 살아오면서 그동안 받은 진솔한 대접에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던 그는 왕년의 기술을 한껏 발휘해서 맹산군이 진나라 소왕에게 예물로 바쳤던 ‘흰여우 가죽옷’을 다시 훔쳐, 소왕이 총애하는 후궁에게 선물로 바칩니다.

   그래서 그 후궁의 베갯머리 송사를 통해 일단 감옥에서는 석방된 맹상군은 신분을 감춘 채 서둘러 도망을 칩니다.

 

 

   한밤중에 국경지대인 함곡관에 당도합니다. 화급을 다투는데, 그러나 관문이 굳게 잠겨있습니다. 그러자 역시 식객이었던 동행인 중에 닭울음소리 흉내를 잘 내는 천출이 있었는데, 그가 닭울음소리를 내며 새벽을 깨우자 인근의 닭들도 덩달아 울어댑니다. 그러자 관문이 활짝 열립니다. 한참 후. 비로소 속은 것을 안 진나라 소왕의 추격군이 함곡관에 들이닥쳤지만, 맹상군은 그곳에서 이미 벗어난 후였습니다.

   사회적으로 별볼일 없는 죄인과 천출들을 극진하게 대접했기에 오히려 그들에 의해서 생명 자체를 구한 지혜자 맹상군. 죽고 사는 것은 오직 ‘하늘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이 그렇게 도우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지혜’인 솔로몬의 잠언을 들어봅시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주시리라.-(잠언19:17)

 

 

   과연 ‘선한 사마리아인’인 같은 ‘선한 맹상군’에게도 저 말씀이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누가복음14:12-14)

 

 

   물론 기원전 3세기 그러니까 신구약중간시대를 살았던 동양의 맹상군은 성경도 솔로몬도 예수 그리스도도 몰랐지만, 그는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인생들에게 ‘일반은총’으로 주신 ‘하나님의 지혜’를 알았던 것입니다. ‘진리’는 예나 지금이나 진리이고,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이방인)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로마서1:19)

 

 

   그렇습니다.

   신앙의 유무(有無)를 떠나서라도,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과 함께 사는 운명공동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 특히 인간에게 그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함께 그것을 알 수 있는 지혜를 이미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런 지혜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한 일일 것 같지만 그래서 뭔가 자기가 손해(?)보는 일일 것 같지만, 실인즉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저 맹상군의 경우처럼 되레 자기를 살리는 일입니다.

 

 

   유대인의 명언 중에 이런 말이 있지요.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킨 것이다.”

   말을 바꾸자면, ‘유대인이 신앙을 지킨 것이 아니라 신앙이 유대인을 지켜준 것이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오히려 우리를 현재까지 이만큼이나마 지켜주고 도와주고 살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적 독선이나 교만은 물론이고, 신앙적 나태나 게으름에 빠져서는 안 될 이유와 필연이 거기 있습니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부족한 것이 있어서 우리에게 제물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외로워서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한 몸인 부부(夫婦)가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듯이 말입니다. 그럴 것이 ‘하나님’과 우리는 창조 질서 내지 메커니즘 자체가 영적(靈的)으로 ‘한 몸’인 유기체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도 실인즉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이웃’ 역시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동일한 자녀들이자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이웃’을 잃으면 불행하게 되는 쪽은 하나님도 이웃도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이고, 우리 자신입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순교했던 독일 신학자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를 ‘타자를 위한 존재(being for others)’라고 정의했습니다만, 그 의미 역시 ‘타자(他者)’ 곧 전적으로 ‘이웃’을 위한 삶이 실인즉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다운, 하나님 앞에서 가장 ‘하늘의 복’이 있는 삶이라는 모본으로써의 강조치인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에 오시는, 그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밥상은 신령한 밥상입니다. 신령한 잔치입니다. 그 분 자신의 피와 살 전부를 나눠주시는 ‘절대 타자’ 곧 전적 타자의 밥상이자 잔치인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자 칼 바르트가 언급한대로 세상 내지 모든 피조물과 전적으로 구별되는 '절대 타자'로 존재하는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스스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찾아오신 그 분의 계시성인 것입니다. 절대 구원의 비밀이자 영생의 비밀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다시 그를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음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한복음6:53-55)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자들은 죽었습니다.

   동양의 지혜의 잔치인 ‘맹상군의 밥상’에서 먹었던 자들도 죽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모르고, 세상의 생명이나 세상의 복(福)의 차원에 연연해서 울고 웃다가 다 죽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manna)’ 그것이 장차 세상에 오실 메시야 곧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이자 예표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참된 음식’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맹상군의 지혜나 군자성 역시 한 시대의 밥상일 수는 있어도 그가 '절대 타자'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참된 음식 및 음료’도 아니었습니다.

   참된 것이 오면 임시의 것이나 거짓된 것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영원한 생명(永生)이 오면 한계의 생명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진짜로 좋은 것이 오면 덜 좋은 것은 저절로 버려지기 마련입니다.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한때 군중들에게 ‘메시야’로까지 추앙을 받았던 세례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한복음3:30)

   세례 요한 그는 과연 ‘여자가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였습니다. 세상이 난 자 중에 가장 크게 성령에 의해 열린 자이자 진리를 깨달은 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그 밥상을 이미 대접 받은 그래서 이미 ‘빚진 자’가 된 오늘의 우리는 또한 ‘타자를 위한 존재’인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서, ‘갚을 것이 없는’ 작은 자들 누구에게, 사회적 약자들 누구에게, ‘우리의 살과 피’를 또한 나눠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실행하는 자들에게는 금세에서도 살고 내세에서도 사는 참된 ‘하늘의 복’이 또한 있을 것입니다. 권력과 재물을 포함한 ‘세상의 복’은 그 모든 것이 허무한 한계의 것입니다. 녹이 슬고 썩어지는 것입니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의 복이 아닌, ‘참된 생명’이자 ‘영원한 생명’인 하늘의 복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추구하는 삶의 목적이나 가치관이 다른 것입니다. 그것이 다르지 않다면, 세상 내지 세속의 그것과 도무지 구별되지 않는다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들 역시 그리스도께서 ‘도무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쌓은 것이니라.-(디모데전서6:17-19)

 

 

                                                                      (Ω)

 

 

--------------------------------------------------------------

 

 

 

 

       (♣)

 

 

   -슬프게도 많은 기독교서적들을 보면,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을 버리고

    개인적인 만족과 감정의 안정을 위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제자도가 아닌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편안하게, 잘 적응하여

    살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그분의 목적은 그보다 훨씬 깊다.

    그분은 우리를 천국에 데려가시기 전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기 원하셨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특권이고,

    즉각적으로 수행해야할 책임이며,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할 종착점이다.-

 

 

                                                        *릭 워렌*

 

 

 

-------------------------------------------------------------

 

 

 

 

       (♣)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바루크 스피노자*

 

 

 

       (*)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내일 우리 인생의 종말이 온다 해도,

    오늘 한 그루의 그리스도의 나무를 심게 하소서.

    오늘 한 그루의 감사의 나무를 심게 하소서.

    오늘 한 그루의 사랑의 나무를 심게 하소서.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풍파를 이기는

    하나님의 비밀이자 죽어도 사는 생명이고,

    감사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긍정이자 여유이고,

    사랑은 그 모든 것의 열매임을 알게 하소서.

   

    믿음은 그리스도처럼 오래 참는 인내이자 끈기이고,

    오늘의 종말은 내일의 시작이고,

    금세의 종말은 내세의 시작임을 믿게 하소서.

 

 

                                                                        (Ω)

 

'영성 편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누군지 아나?'   (0) 2013.02.18
귀성열차   (0) 2013.02.11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  (0) 2013.01.28
'상처 입은 치유자'들   (0) 2013.01.21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의 평화'  (0) 2013.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