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도 뜨지 않은 캄캄한 밤.
군부대 안에서 한 신참졸병이 PX를 향해 쌩쌩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청년 졸병은 순간적으로 누군가와 크게 부딪치고 맙니다.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진 쪽은 상대방입니다.
상대가 일어나서 바지를 툭툭 털더니 졸병을 노려보며 소리칩니다.
“내가 누군지 아나?”
이윽고 상대를 알아본 졸병이 질겁한 채 떨며 대답합니다.
“넷! 아이젠하워 각하이십니다.!”
별이 무려 다섯 개인 장군.
“이건 군법회의 감이다!”
당황한 졸병이 기민하게 묻습니다.
“각하,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더욱 화가 치민 장군이 고함칩니다.
“네 놈이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앗!”
순간 되레 살았다 싶은 졸병은 오금아 나 살려라는 듯 어둠 속으로 도망쳐버립니다.
현역 오성장군의 막강한 권위나 권세도 그런 신참 졸병 앞에서는
차라리 무능하도록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 아나?’
과연 인간 나는 누구일까요?
인간의 정체성 그 진면목을 좀 묵상해봅시다.
루마니아 태생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20세기 문인 시오랑이 이런 자전적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바로 모든 것이라는 감정과 아무 것도 아니라는 자명한 사실.’
젊은 시절, 나는 우연히 저 한 토막의 문장에 부딪쳤다. 나는 흥분하였다.
그 당시 내가 느끼고 있던 모든 것, 그 후 느끼게 되었던 것,
그 모든 것이 성취와 좌절, 황홀감과 낭패감의 종합인
저 기묘하고도 평범한 표현 속에 집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모든 것’이자 또한 ‘아무 것도 아니다’는, 실존적 인간의 모순된 정체성을 절감한 자만이 토로할 수 있는 흥분이자 고백이 되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성경 창세기에 나타난, 인간의 정체성을 살펴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dust)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a living being)이 된지라.-(창세기2:7)
물론 창조주 하나님은 날짐승이나 길짐승이나 어류 등 모든 ‘생물(a living being)’(창1:24)을 ‘말씀’으로 명하여 만드셨습니다. 인간 역시 같은 성질의 ‘생물’ 내지 ‘생령’이지만, 그러나 상대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이 친히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주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신적 생명력을 불어넣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신적 생명력 그것이 바로 모든 동물들과는 다른, 인간이 인간 될 수 있는 거룩한 정체성이자 구별성인 것입니다.
저기서 ‘흙’ 곧 히브리어 ‘아파르’는 ‘흙, 먼지, 티끌’을 의미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라는 고유명사가 일반명사가 되면 ‘사람’을 의미하고 그것은 ‘땅, 흙, 티끌, 고향, 세상’ 등을 의미하는 ‘아다마’라는 언어와 그 어원이 같습니다. 그렇듯 ‘아파르’ 역시 저들과 어원이 동일합니다. 한 마디로 육체는 결국 흙이자 먼지이자 티끌이자 세상 자체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개나 돼지 등 뭇짐승의 태어남과 삶과 죽음 그것처럼 허무한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생기’ 곧 ‘하나님의 생명력’ 곧 ‘영원한 생명력’을 가질 때 비로소 인간이 ‘모든 것의 주인’ 곧 ‘만물의 영장’일 수 있고, 참 인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은 주어진 ‘자유의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및 거역함으로서 ‘영(靈)이신 하나님의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대신 ‘사단’ 곧 마귀인 악령에 종속당하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질타처럼 ‘마귀의 자식들’이 되고만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인 하나님의 자녀의 성품이나 신분을 잃고 악하게 타락해버린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허무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파스칼의 명언도 같은 맥락의 의미가 됩니다.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약한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렇습니다. 갈대는 다만 흙이자 먼지이자 티끌입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는 ‘만물의 영장’입니다. 중요한 문제는 ‘무엇을 생각하느냐’ 그것이겠지요. 먼저 무엇을 생각하느냐. 먼저 무엇을 구하느냐. 그래서 타락한 인생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친히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새 아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회개할 것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태복음6:33)
먼저 ‘하나님의 생기’ 곧 ‘하나님의 생명력’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곧 복된 구원의 길이자 진리이자 영원한 생명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 내지 만물과 더불어 복되게 살 수 있는 거룩한 정의이자 거룩한 사랑이자 공존의 비밀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남녀 연인 관계에 있어서도, 먼저 사랑을 얻은 자 곧 마음을 얻은 자가 몸도 떡도 얻게 됩니다. 영적 관계도 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 곧 긍휼을 얻은 자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등 ‘세상의 복’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복을 ‘부자’되는 것으로 오해하지는 맙시다. 하나님은 진실로 사랑하시는 영혼의 사람을 결코 ‘세상의 부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위해 더 시간을 소비할 수밖에 없는 ‘부자’로 놔두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가진 재물을 스스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시는 역사가 하나님의 선이자 섭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태복음19:23)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결코 축복이 아니고 차라리 장해물이자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부자’는 능력이 아니라 탐욕입니다. ‘천국’을 향해 가는 ‘나그네’에게 필요 이상의 소유는 분명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자 재앙일 뿐입니다.
‘내 자식을 위해서’가 늘 부모의 마음이지만 자녀에게 물려주는 재물이, 더 먼저 더 크게 물려줘야할 신앙 내지 인격 내지 양심이라는 심령의 재산의 분량보다 더 클 때 되레 그 재물이 자녀들을 방탕이나 악연이나 불신앙이나 불행으로 인도한다는 것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정당한 노력과 땀의 가치나 결과가 아닌, ‘한국식 부자 되기’의 ‘관행’이자 수단이었던 부동산 투기가 부동산 투기를, 탐욕이 탐욕을 대물림하는 그런 가문이나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업광고에 길들여진 것처럼 자본주의에 이미 길들여진 그래서 돈과 재물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다는, 오직 그것이 최선의 복(福)이고 최고의 목적이 된 우리의 가치관을 충심으로 회개하고, 먼저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참된 복의 진정성에 열려져야할 것입니다.
참된 복을 얻은 자가 굶어죽은 자는 없습니다. 세상 의식주의 결핍 때문에 죽은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까마귀’를 시켜서라도, ‘돌이 소리를 지르게’해서라도, 그들을 먹여 살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천하도 재물도 자기 육신도 종말론 앞에서는 한낱 흙이자 티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혹자들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부자’였다고 강조하며, ‘성공복음’을 설파하며 부자 되기를 합리적으로 가르치던데 그래서 인기도 주가도 높던데,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나 말씀을 벗어나면 그 벗어난 ‘자기복음’이나 ‘자기말씀’이, 그 자기 죄악이나 자기 교만이 결국에는 이미 세속화된 자기의 목이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을 또한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누군지 아나?’
아브라함을 알려면 온전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티끌’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소돔성’이라는 공동체 내지 사회의 구원을 위해서 이렇게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중보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 오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의인)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창세기18:27-33)
아브라함은 그렇게 ‘티끌이나 재 같은’ 인간 자기의 정체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속물인 우리와는 달리, 이미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창세기15:6) 위대한 인물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한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럼 시쳇말로 ‘내로라’ 폼을 잡을 만도 합니다. 스스로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자 의인이라고 어깨에 힘을 주며 교만해질 법도 합니다. 신약시대의 ‘성공한 바리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겸허한 아브라함은 ‘티끌과 재 같은’ 자기 정체성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자기 분수의 자리를 끝까지 떠나지 않습니다. 부자 되기를 가르치는 ‘자기복음’이나 ‘성공복음’을 설파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재물’보다 더 소중한 외아들 이삭조차 하나님의 제단에 드렸고, 저렇게 멸망을 당해야 마땅하도록 타락한 ‘소돔성’이라는 사회의 구원을 위해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마음으로 중보기도를 드렸던 진실한 신앙 인격이자 선한 양심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와 내 자식들’만을 위한 이기적인 ‘복의 근원’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타적인 ‘복의 근원’입니다. 죄인들과 약자들을 살리고 그런 이웃과 공존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후예’인 우리도 아브라함의 ‘부자’인 재물보다는, 먼저 영적으로 더 ‘부자’인 그의 신앙 인격을 진실로 본받을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를 위해서는 날마다 호의호식으로 즐기면서도 자기 집 대문 앞에 버려진 채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는’ 병고를 앓으며 사는 ‘거지 나사로’는 외면하며 살다가, 마침내 죽어서 고통 받는 ‘음부’로 떨어진 ‘한 부자’(누가복음16:19)와는 그 삶이나 인격이 전혀 다릅니다. 무섭도록 이기적인 저 ‘한 부자’는 자기의 구원을 위해 선을 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그렇게 외면해버렸지만, 아브라함은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작은 이웃인 ‘거지 나사로’를 ‘품’에 안는 ‘선한 아브라함’입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누가복음16:22)
전 경제학에 문외한입니다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학의 아버지’인 하이에크 교수가
‘인간의 이기심이나 소유욕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동력이자 시장의 모든 것일 수 있다’고
설파한 지론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성공한 그 배부른 토양에서 필연적으로 창궐하는 죄악의 늪에서의 구원에는 아무 것도 아닐 만큼 무능한 것이 또한 자본주의 이념이자 그것에 길들여진 인간들의 한계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자본주의 사회가 마르크스의 이론처럼 양극화된 ‘계급의식’ 때문에 스스로 붕괴되는 것도 아닙니다. 되레 먼저 붕괴된 쪽은 마르크스 이론에 기초를 둔 ‘소비에트 제국’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나 마르크스 공산주의 같은 세상의 이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돔성과 고모라성이나 로마제국이 멸망한 것은, 그들이 ‘부자’가 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재물이나 권력이나 병력이나 이념이나 철학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재물이나 각종 소유가 많아져서, 배도 부르고 머리도 불러져서 영적으로 타락했고 그래서 각종 죄악이 들끓어서 파멸했습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갈파처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합니다.’
‘내가 누군지 아나?’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생기’인 영성(靈性)을 잃으면 인생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만 ‘티끌’입니다. 다만 ‘죄인들’입니다. 따라서 인생 우리는 먼저 죄악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한다는 것.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 그러면 우리 역시 운명이 변화되어 고귀한 신분인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그래서 진실로 가치 있는 세상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본주의 이념이나 재벌이나 권력자 등을 부러워하거나 닮아가는 그것이 전혀 아닌, 오직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소신 있는 신앙 인격 자체가 ‘행인과 나그네의 여정’인 이 세상의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하나님의 비밀이자 능력이자 지혜’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린도전서1:18, 24)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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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는 참으로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셨으나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셨다.
남을 돕기 위한 기적과 능력을 갖추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구하는 데는 전혀 무능하셨다.
약한 자를 구해내기 위해서는 바람과 파도도 꾸짖어서 이를 잔잔케 하신 그는,
자기의 원수들 앞에 섰을 때는 그들을 대항하기 위하여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기적보다 몇 배나 더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의 사심 없는 마음이다.
하지만 그런 놀라운 마음이 있었기에 비로소 저런 놀라운 기적을 행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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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에 기독교의 스승들이 악한 사람의 행위는 미워하되
그 사람 자체는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는군요.
그들이 늘 말했듯이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저는 이런 구분이 너무 지나쳐서 우습기까지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어떤 사람의 행위는 미워하면서 그 사람은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몇 년 후, 제가 평생 동안 그렇게 대해 온 사람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저는 자신의 비겁함이나 자만심이나 탐욕은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계속 자신을 사랑해왔습니다. 그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제가 그런 것들을 미워한 이유는 바로 저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일을 저지르는 종류의 인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토록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C. S.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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