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선한 목자'의 성품을 닮은 이순신 장군

이형선 2013. 3. 4. 10:27

 

   우리 민족사에서 ‘길이 빛나는 인물’이자

   '난중일기'의 저자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

   장군이 왜적과의 대전을 위해서 강진 고금도로 진을 옮기자

   남부 지방 백성들은 목자를 좇아가는 양떼처럼 속속 그곳으로 몰려듭니다.

 

   무술년 그 해 가을. 명나라 도독(都督) 진린도 해군 오천 명을 인솔하고 들어와 원군으로 가세합니다. 진린은 성정이 거칠고 오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그도 이순신 장군의 인품이나 장군으로서의 면모를 가까이서 살핀 후에 누차 이렇게 칭송했다고 합니다.

   “이순신은 소국의 인물이 아니다. 그가 만일 중국에 들어가 벼슬을 한다면 의당 천하에 제일가는 장군이 될 것이다. 그가 소국에 엎드려 있게 된 것은 참으로 애석하다.”

 

 

   이순신 장군은 후세의 역사가 평가하는 그대로, 정녕 휘하의 작은 백성이나 ‘군사 하나도 함부로 죽이지 않은’, 사심이 없었던 민족의 영웅이자 위대한 구국의 지도자였습니다. 성서적 표현을 빌리자면, ‘선한 목자’의 성품을 닮은 분이었습니다.

   그럼 그런 장군의 인품이나 담대한 능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저는 그것을 장군의 이런 면모에서 찾아보고 싶습니다.

 

   어느 날. 왜군들과 치열하게 접전 공방하는 전투 일선에서 이순신 장군은 여느 때처럼 친히 활을 잡고 직접 사격을 하며 부하들을 지휘합니다. 그러자 너무 위험하다 싶었던 부관들이 나서서 적극 말립니다.

   “어찌하여 나라를 위하여 몸을 자중하시지 않습니까?”

   그때 이순신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 명(命)은 저기 있다. 어찌 너희들만 적 앞에 내세운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진실로 ‘하늘’을 알아야합니다.

   온전히 ‘하늘’에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기적인 안일에 잡히지 않고 그래서 되레 땅에서도 바다에서도 의연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고 헌신적인 인품도, 삶과 죽음조차도 초월한 담대한 용기도 ‘하늘’을 아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이자 축복입니다.

 

   그것을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풀어봅시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들보다 귀하니라.-(마태복음10:28-31)

 

 

   ‘장미’는 거리를 두고 볼 때 아름답습니다.

   가까이 가면 그것이 시인 릴케의 표현처럼 ‘순수한 모순’이든 불순한 모순이든 간에, 모든 장미에게는 다 ‘가시’라는 모순이 있습니다. 그처럼 인간에게는 다 인격적인 혹은 위선적인 ‘모순의 가시’가 있다는 것. 따라서 가까이서 살핀 후에, 가까이서 살아보거나 모셔본 후에 되레 그 인품을 존경할 수 있고 칭송할 수 있다면, 그런 인품은 그만큼 ‘자기’라는 ‘모순의 가시’를 극복한 경우가 되겠지요. 그만큼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하늘을 따르는’ 경우가 된다는 것.

   마음에서부터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는 그런 장군을, 그런 목자나 스승이나 지도자를, 그런 상사를 모실 수 있는 부하나 후학이나 아랫사람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그 인도자나 그 추종자나 결국은 다 불행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따라서 ‘나그네의 길’이라는 인생 여정에서 영원한 창조주 ‘하나님의 비밀이자 십자가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참 목자’로 만나고, 알고, 진실하게 믿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은 사람들은 그 자체만으로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유명무실한, 명목상의 기독교인 곧 ‘노미널 크리스챤(nominal christian)’이야 많지만 ‘보는 눈’이나 ‘듣는 귀’나 ‘깨닫는 마음’이나 진실하게 ‘믿어지는 믿음’은 결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은혜는 아니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의 교지를 받고, 조선수군에게 그나마 남아있던 전선 13척으로 울돌목(명량해협) 전투에서 왜군의 전선 333척을 대적해서 그 중 31척을 격침시키고 적군을 퇴각시켜버린 대승을 거둡니다.

1597년 당시,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 저 결전을 앞두고 부하들에게 우리가 잘 아는 휘호를 내립니다.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마가복음8:34-35)

 

 

   우리를 고생길 혹은 불행이나 죽음의 길로 인도하는 분이 아닙니다. 구원의 길, 생명의 길,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선한 목자’의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인간 ‘자기’는 이미 타락한 그래서 철저하게 이기적인 ‘죄인의 성품’이자 ‘죄악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라는 ‘옛사람의 성품’을 부인하지 못하면 거듭난 ‘새사람의 성품’ 곧 ‘그리스도의 성품’은 결코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 잘 믿는 사람’은 한 마디로 ‘자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대형 목회에 성공한 사람도 아니고, 수행이나 학문이 높은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 자체가 그런 것처럼 ‘어린아이’나 ‘할 일을 했을 뿐인 무익한 종’처럼, ‘자기가 없는 사람’이 진실로 ‘예수 잘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목회에 성공했다고, 금욕적으로 수행하며 더 거룩하게 살았다고, 남보다 학문적으로 더 유식하다고 은연중 ‘자기가 있는 사람’은 그 자체부터가 유치한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기는 어렵지 않던가요? 가까이 접할수록 되레 존경심이 사라지고, 인격에 대한 실망이 더 커지지 않던가요?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이나 세리들과 어울려 격의 없이 함께 먹고 마시던 ‘선한 목자’였습니다. 프란치스코나 마더 테레사 역시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늘 함께하던, 진실한 섬김과 헌신이 있는 성자 성녀였습니다. 역사와 제자들을 비롯한 측근들이 되레 그 ‘향기’를 증언합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저분들에게서 풍기는 ‘그리스도의 향기’는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며 끝까지 겸허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았던 거기서 우러나온다는 ‘영(靈)의 비밀’을 우리는 유념해야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나 크고 작은 모든 사건과의 관계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데서 멎으면 더 이상의 생명이나 발전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를’ 때, ‘우리’라는 공동체의 사랑의 역사도, 정의의 역사도, 구원 및 평화의 역사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가 뭡니까.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한다’ 곧 ‘필사즉생(必死則生)’의 삶 그 자체가 아닙니까. 그렇게 한 시대를 살다 죽은 예수 그리스도는 불행한 사람입니까? 설령 사흘 후에 부활하지 못했다 쳐도 말입니다. 그렇게 한 시대를 살다 죽은 이순신 장군은 불행한 사람입니까? ‘길이 빛나는 인물’ 아닙니까! '세상의 빛' 아닙니까!

 

   과연 사람은 돈이나 떡이나 주색만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이기적인 부귀영화를 누리며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황제 카이사도, 선조 임금도 허무하게 다 죽었습니다. 과연 사람은 33년을 살다 죽어도 아니 단 한 해를 살다 죽어도, 진실로 뜻이 있는 삶을, 영원한 가치가 있는 삶을 살다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순신 장군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품’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선한 목자’의 성품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참인간의 성품이나 진리는 ‘하늘 아래서’ 하나로 통한다는 열림일 수가 있겠지요. 그래서 오늘도 조국을 지키는 이순신 장군은 패색으로 수심이 깊은 임금 선조에게, 아니 가진 것이 너무 없다고 불평과 원망과 비관 일색인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나이다.

    신이 죽지 않는 한 적들은 감히 저희들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할 때 희망도 생기고, 기적도 생깁니다.

   우리는 어려운 조국 및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니 작은 이웃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서, ‘아직 남아 있는’ 우리의 가능성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12척’ 그 후 막판에 추가된 1척을 포함한 13척으로 333척의 왜선과 대적한다는 발상은 도대체가 물리적으로 답이 나올 수 없는 불가능한 전투입니다. 그러나 ‘기적’은 있었습니다. 물리적인 답은 없었지만,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라는 정신의 답은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솟아나는 힘과 능력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스라엘을 침공한 블레셋(*팔레스틴)군대의

   골리앗 장군은 키가 무려 2m 93cm 정도나 되는 거인입니다.

   그런 자와 베들레헴 출신의 일개 목동이자 아직 십대 소년인 다윗이

   대적한다는 것은 도대체가 물리적으로 답이 나올 수 없는 불가능한 전투입니다.

   그러나 ‘기적’은 있었습니다.

   물리적인 답은 없었지만 믿음(信仰)의 답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담대한 심령에서 솟아나는 힘과 능력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도우시는 섭리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소년 다윗은 골리앗 장군처럼 칼도 창도 갑옷도 착용하지 않았습니다. 목동인 자기 모습 그대로의 차림새로 전투에 임합니다. ‘선한 목동’의 자세로 곧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한다’는 결사각오로, 수시로 침략하는 사자나 곰 등을 대적해서 물리치며 양떼를 지키는데 사용하던 돌팔매질용 ‘물매’만을 가지고 거인 골리앗 장군과 맞섭니다. 그런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며’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 장군을 향해 소년 다윗은 이렇게 담대하게 외칩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사무엘상17:45-47)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골리앗과의 전투에 임한 소년 다윗은 물맷돌을 날려 일격에 골리앗 장군을 쓰러뜨리고 맙니다. 물맷돌이 칼과 단창을 휘두르며 마주 달려오던 골리앗 장군의 이마에 박혀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골리앗 장군이 죽자 블레셋군대는 죄다 도망을 가버립니다.

   일선에서의 전투는 다윗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속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블레셋과의 전투가 다윗 ‘나의 원대로’ 임한 전투가 아닌, ‘아버지의 원대로’ 임한 전투였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종’ 다윗은 그래서 골리앗 장군과 블레셋군대를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듯 세상살이라는 오늘의 모든 직업 일선에서의 ‘전투’는 역시 우리 개개인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전쟁의 승패나 역사의 부침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노력할 수 있을 뿐, 그 결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대상이나 문제가 전쟁이든 십자가이든 사업이든 간에, ‘나의 원함’이나 ‘나의 뜻’이 아닌 ‘하늘의 원함’이나 ‘하늘의 뜻’을 먼저 구할 수 있어야겠지요. 그래야만 ‘선한 목자’의 성품을 닮은 이순신 장군이나 다윗처럼 담대하게 ‘전투’에 임할 수 있고, 하늘의 도움을 받아 ‘전쟁’에서 이길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만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처럼 의연하게 십자가조차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부활을 통해 죽음마저도 이길 수 있으니까요.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26:39)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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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다운 꽃의 색깔도 그 땅 속 뿌리에서 준비된 것이다.

    나무가 아무 소리 없이 한 마디씩 한 마디씩 자라는 것도 땅 속 뿌리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나무를 보고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은 먼저 그 나무의 뿌리에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의 골방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그런 골방이 아니다. 이 골방은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고 칭찬하는

    그런 어떤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이 골방은 마치 나무의 뿌리와 같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뿌리가 자라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골방 속에서이다.

    만약에 뿌리에서 자양분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그 나무는 머잖아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밀러(J. R. Miler)*

 

 

 

 

 

   -너는 기도 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신약성경, 마태복음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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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