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지구촌의 세계를 이루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는 독일의 명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그는 1815년에 태어나, 32살에 조국 프로이센의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뛰어난 정치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왕의 신임을 받으면서 재상으로 있던 그는 덴마크,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랑스와의 보불전쟁 등을 각각 승리로 이끌면서 여러 게르만 민족의 국가들을 합병해서 마침내 최초로 근대적인 중앙집권 형태인 통일국가 독일제국을 세웁니다. 그리고 빌헤름 1세를 왕으로 옹립하고, 이후 20년 동안 수상으로 있으면서 독일을 유럽 제1의 공업국가로 만들었고, 한편으론 세계 최초로 의료보험이나 산재보험, 노인복지법의 시행을 통해 사회복지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지혜가 뛰어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통일 대제국 독일의 ‘건국대연회’에서 있었던 일화를 통해 우리는 그의 신앙인격의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유럽의 천하통일을 이루고 자축하는 자리인 만큼 빌헤름 1세 왕을 위시한 신하들은 성취욕을 만끽하며 서로 취흥을 돋웁니다.
그때 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이여, 이제 유럽 전체를 정복하고 대독일제국을 세웠으니 모두들 수고하였소. 이 게르만 민족의 대제국 왕인 짐은 대체 얼마만큼의 값을 매길 수 있다고 생각을 하시오?”
그러자 술에 취한 신하들은 ‘200억 마르크’라느니, ‘500억 마르크’라느니, ‘5000억 마르크’라느니 하면서 계속 주가를 높이며 아부성 발언을 이어갑니다. 그런데도 정작 일등공신인 비스마르크는 침묵일색입니다. 왕이 그에게 직접 독일제국 왕의 값어치를 묻습니다. 이윽고 비스마르크가 입을 엽니다.
“저는 29마르크 드리겠습니다.”
순간 왕은 물론이고, 좌중이 그 무례함에 오히려 당황할 지경이었습니다.
의아한 왕이 그 연유를 묻자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답합니다.
“폐하, 저의 계산은 이러하옵니다.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은 30에 팔리셨습니다. 온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께서 30에 팔리신 바에 근거해서, 저는 천하를 정복한 게르만 민족의 왕이신 폐하께는 바로 그 다음인 29마르크를 드리는 것이옵니다.”
그제야 왕과 신하들이 비스마르크의 지혜에 감탄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거립니다. 대제국 독일의 왕조차도 그리스도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은유적인 강조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역사는 그를 ‘철혈(鐵血) 재상’이라고 부릅니다.
비스마르크가 소국 프로이센 재상으로 있을 때, 의회에서 행했던 그의 연설에서 비롯된 별칭입니다.
“오늘날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鐵)과 피(血)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잦은 전쟁으로 유럽의 정세가 어지러웠던 당시 저 ‘철과 피’는 각각 ‘무기와 희생의 피’를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아마도 ‘그리스도의 살과 피’(마태복음26:)라는 성경의 구원의 말씀에서 지혜를 얻어, 조국의 구원을 위해 현실 정치에 활용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20세기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을 역사는 ‘철의 여인(The Iron Lady)’이라고 부릅니다. 보수당 출신이자 여성답지 않은 강인한 소신과 추진력을 가지고 최악의 경제상황 속에서도 포클랜드섬 영유권을 둘러싼 아르헨티나와의 ‘무모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나아가 고질적인 각종 ‘영국병’을 치유하고 난국에 처한 영국 경제를 부흥시킨 그녀의 그 구국적인 철저한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칭송이자 평가인 것입니다.
‘철혈 재상’이라는 비스마르크에 대한 역사의 평가도 그런 맥락의 의미이겠지요. 여하간 그렇게 외친 후 8년여 만에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대통일 과업을 성취했습니다.
물론 독일 제국은 자유선거에 의해 수립된 통일정부는 아닙니다. 프로이센에 의해 정복되어 통일된 제국입니다. 우리 한족(韓族)이 신라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정복되어 통일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정적(政敵)은 있기 마련이고, 비스마르크를 ‘독재자’ 혹은 ‘국수주의자’라고 비판하는 세력도 있습니다.
인간 누구에게나 선악, 장단점, 빛과 어둠(明暗), 공과(功過)는 있기 마련입니다만, 분명한 것은 그는 자기의 값어치를 ‘29마르크’ 이상으로는 평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것입니다.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겸손하게 살고자 하는 인생의 가치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비스마르크가 청년시절에 경찰서 서기로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또래의 동료들과 어울려 장래의 희망을 서로 나눈 적이 있다고 합니다.
모두가 부자나 재상이나 장관 등 크고 높은 신분이 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꿈 내지 희망은 보다 현실적이었습니다.
“난 부장이 되고 싶다.”
서기 바로 윗자리가 부장입니다. 그러니까 비스마르크는 뜬구름 잡는 식의 막연한 꿈이 아닌, 오늘의 자리에서 주어진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삶 속에서 희망을 간직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만일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누가복음16:10-12)
그렇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비스마르크는 그래서 드디어 그의 소원대로 ‘부장’이 되었고, 그리고 재상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재상’이 되겠다던 동료들은 대개가 ‘부장’조차 되지를 못했습니다.
장래의 꿈이 대통령도 판검사도 좋지만, ‘작은 것’에 충성치 못하거나 ‘작은 자’를 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침내 그 꿈을 이루어도, 높은 자리에서 되레 부정이나 비리나 신분의 남용을 양산해서 나라까지 어지럽게 만드는 경우가 항다반사입니다.
또한 ‘부자’되는 것도 좋지만,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저기서 세상의 재물을 ‘불의한 재물’이라고 표현하신 의미를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 ‘재물(mammon)’ 곧 헬라어 ‘마모나스’는 그대로 고유명사가 되면 ‘부의 신, 탐욕의 신(神)’의 이름이 됩니다. 따라서 이미 탐욕화되고 신격화되고 주인이 되어버린 그런 ‘세상의 재물’은 ‘참된 것’ 곧 신령한 ‘천국의 재물(寶貨)’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자체가 불의하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것은 또한 영원한 생명력이 없는 한계인 허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허무한 재물’로 풀어보면 이해가 더 빠를 수 있습니다. ‘허무한 재물’이지만 그래도 그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창조주 하나님이 그런 사람에게 ‘참된 것’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허무한 재물’로 방탕을 일삼는 사람에게 ‘참된 것’을 줘서도 안 되겠지요.
그러면 세상의 ‘불의의 재물’ 혹은 ‘허무한 재물’을 가장 가치 있게 쓸 수 있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eternal dwellings)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누가복음16:9)
불의한 재물로 불의한 비리나 부패나 이권이나 방탕을 사귀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허무한 재물이 있을 때, 그것으로 선(善)을 베풀어서 이웃을 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선이 자기를 영원한 처소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내 것이나 내 몫이나 내 가족의 몫에 충성하거나 챙기는 데는 빠르지만, ‘남의 것에 충성’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남에 대한 배려나 관용에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갈라디아서6:7) 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불의한 재물’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충성할 때 참된 ‘천국의 보화’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남의 것’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충성할 때 진정한 ‘우리의 것’이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세상과 천국이 하나가 된, 남의 것과 나의 것이 하나가 된 정직한 신앙 인격의 삶을 의미합니다.
잘 알려진 비스마르크의 젊은 날의 일화를 한 가지 더 상고해봅시다.
어느 날, 그가 친구와 함께 사냥을 갔는데 돌연 살려달라는 친구의 고함소리를 듣게 됩니다. 비스마르크가 쏜살같이 달려가 보니, 친구는 이미 깊은 수렁에 처박힌 채 기진한 듯 손만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야, 살려다오! 어서 날 좀 건져다오! 자꾸 빨려 들어간다!”
친구가 살려달라고 계속 애원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손을 내밀 생각도 않고 그냥 선채 지켜보고만 있다가 갑자기 친구의 머리통을 향해 들고 있던 엽총을 겨눕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건지려고 손을 내밀었다가는 나까지 빠져 죽는다. … 미안하지만 너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너를 쏘아죽일 수밖에 없다. 죽어서라도 내 우정을 잊지 말거라.”
비정하게도 비스마르크는 정말 방아쇠를 당기려 합니다.
차라리 분노한 친구는 스스로 살아나고자 악착같이 사력을 다해 아등바등합니다. 그러자 몸이 수렁에서 반 이상 빠져 나옵니다. 그때서야 비스마르크는 비로소 때가 되었다는 듯 불쑥 손을 내밀어 친구를 구출합니다. 그리고 친구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겨눈 것은 네 머리통이 아니라 네 나약한 분투력(奮鬪力)이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자기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敗家)하는 자(one who destorys)'의 형제니라.-(잠언12:9)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우리의 속담과 같은 의미가 되겠지요. 비스마르크가 친구에게 원했던 저 ‘분투력’ 내지 ‘분발력’이 또한 훗날 재상으로 성공한 그가 국민들에게 원했던 ‘철과 피’ 그것의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여하간 사람이 살다보면 때론 원치 않는 곤경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곤경에 빠져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절박한 기도나 절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도 그렇게 오는 것이겠지요. 응답이나 구원을 위한 ‘나의 때’와 ‘하나님의 때’가 다르다는 것. ‘나의 때’가 가장 좋을 것 같고 그것이 축복일 것 같아도, 금세와 내세까지를 포함한 영원한 구원의 시각과 차원에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일수록 먼저 영혼을 살피시는 ‘영(靈)이신 하나님’의 그 때는 늘 다르기 마련입니다. 보다 영적이고, 보다 심오하고 오묘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운명적인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일수록 세상이나 특정 인간을 의지하지 말고, 더욱 치열하게 분발해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해주신 그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마태복음6:33)를 구해야만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구하면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면, ‘저주 받은 운명’도 ‘복이 있는 운명’으로 개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세상에서 돈 벌 궁리를 하는 그 정도의 열정이나 ‘분투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분명히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있는 지혜자 솔로몬의 말입니다.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잠언3:4-8)
나아가, 우리는 세상에 오신 저 ‘하나님이 예비하신 완전한 지혜’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것이 저 솔로몬이나 저 비스마르크를 통해 가는 것보다, ‘완전한 지혜’에 직접 가는 것이 더 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완전한 지혜’를 이렇게 설파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로 마음의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로새서2:2-3)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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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에 부딪쳤을 때 도망치지 말라.
그러면 위험이 두 배로 늘어난다.
그러나 결연하게 맞선다면
그 위험은 반으로 줄어든다.-
*윈스턴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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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임재에
우리 자신을 맞추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고요함 가운데 그분의 임재를 느끼며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연다.
종종 기도는 침묵으로 바뀌고
그분을 향한 깊은 열망으로 채워진다.
이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곳으로 인도한다.
우리는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 오기 전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찾고 계셨음을 깨닫게 된다.
거기서 하나님은 우리의 갈망에 응답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따뜻함에 잠긴다.-
*조이스 허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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