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인간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우리의 신앙인격이 보다 성숙해져야 할 당위적 숙제를 안고,
거룩한 고민을 해야만 할 때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시기 전에,
무려 7백여 년 전에 구약시대의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예언 및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묵상해봅시다.
신약시대에 성취된 그래서 예언이 참 예언으로 증명된,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과 신앙인격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53:4-7)
저 예언의 말씀을 골고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한복음19:30)고 친히 증언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렇게 죄인인 우리를 위한 대신의 죽음 곧 대속의 구원은 분명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난’이 지구상에서 다 사라진 것은 전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처럼 각 사람 내지 각 가정 내지 각 시대에 주어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여전하게 엄존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라는 우리의 몫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가복음8:34)
따라서 ‘자기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는
대속적 고난, 희생적 고난의 삶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대속적 고난’이라고 해서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못난 자식이나 교도소에 수감된 죄인인 자식이자 병들거나 장애인인 자식을 둔 어버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식’이기에 평생을 ‘희생적 고난’을 통해 그 자식을 사랑합니다. 물론 그것은 ‘스톨게’라는 ‘혈육의 사랑’의 차원이지만 그래도 거기엔 늘 숙연한 감동과 눈물이 있습니다. 그런 희생적 고난이자 사랑이 바로 인간 우리 모두를 위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곧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통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이자 '아가페'의 사랑과 통한다는 것입니다.
못난 혹은 죄인인 ‘내 자식’을 그래도 사랑하는 그런 어버이의 사랑의 완성(完成)이 곧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이자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그리스도의 마음과 십자가의 삶을 본받아, ‘내 혈육’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이웃이나 사회나 민족이나 인류를 살리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아간 신앙위인들을 ‘작은 예수’ 혹은 ‘제2의 예수’라고 부릅니다.
그럼 여기서 ‘제2의 예수’라고도 불렸던
‘아씨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의 삶을 좀 묵상해봅시다.
그는 1182년에 이탈리아 아씨시에서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부자의 아들답게 남보다 더 누리고 즐기는 삶도 살아보고,
십자군전쟁에 참가했다가 1년여 포로 생활도 겪어보고,
병고 등을 앓으면서 그는 세상적인 패권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그런 삶에 점차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는 마침내 대부호의 아들로써의 모든 기득권을 버려버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서 가난한 수도자의 길을 택합니다.
그는 25살 때,
다미아노 성당의 십자가 아래서
기도하던 중 이런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습니다.
“프란체스코야, 쓰러져가는 내 집을 다시 지어라.”
당시 그는 쓰러져가는 그 성당의 ‘건물’을 다시 지어라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그 교회의 개보수를 위해 적극 나섰지만 그것은 건물을 짓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세속적으로 타락한 중세 가톨릭교회 그 자체를 다시 지어라는 시대적 소명이자 초대교회사적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중세기 당시 정교(政敎) 유착을 통해 부와 권력과 호사를 누리며 타락의 길을 걷던 교계(敎界)로의 진출을 거부하고, 낮은 곳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겸손하게 섬기며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파합니다. 상대적으로 순결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지만, 그렇다고 그는 타락한 세상이나 가톨릭 교계를 향해 ‘개혁’ 운운하며 목소리를 높여 부정적으로 비난하거나 비판하지도 않았습니다. 적대하며 담을 쌓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고난과 사랑을 본받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자기 몫의 길을 갔을 뿐입니다.
그는 새나 짐승 같은 동물이나 식물들과도 ‘형제자매처럼’ 대화와 사랑을 나누며 삽니다. 인가에 해코지를 일삼던 흉악한 늑대들조차도 그의 앞에서는 회개하듯이(?) 고개를 조아리며 순종했다니까, 그만큼 심령이 순결하고 청결했다는 반증이겠지요. 그래서 성령의 권능이 충만했다는 반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성난 파도나 바람조차도 순종했었으니까.
여하간 그렇게 세상 내지 자연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 사랑의 시각을 가지고 세상 내지 자연에 존재하는 그 모든 피조물들에게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설파한 그는 그래서 ‘제2의 예수’라고까지 불렸습니다.
또한 그는 죄인인 인간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해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난과 고통을 체험하고 싶어, 라 베르나 산에서 기도하던 중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입으신 다섯 가지 상처 곧 두 손과 두 발과 옆구리의 ‘오상(五傷)’을 직접 몸에 받기까지 합니다. 당시 공식적으로 확인까지 받은 ‘오상’이라니까 신비한 이적입니다.
그는 그것을 심오한 은총이자 축복으로 받지만, 그러나 손에도 발에도 '못자국' 하나 없는 속물인 우리의 안목으로 보면 그것은 전혀 은혜도 축복도 아닙니다. 다만 육체적 고통일 뿐입니다. 실인즉 프란체스코 성인은 그래서 그 후 기력과 시력마저 점차 잃고 44세를 일기로 마침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조차도 “어서 와요, (나의)자매(姉妹)인 죽음이여!”라고, 기쁘게 맞이하며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육신을 벗고 하늘나라로 간 것입니다.
과연 ‘십자가’ 그 고난에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신비가 있고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 죄인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고난 자체에 하나님의 비밀이 있고 신비가 있듯이, 프란체스코가 받은 그리스도를 좇는 ‘자기 십자가’의 고난에도 역시 비밀이 있고 신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신 것처럼, 그 역시 살아서 행한 일보다 죽어서 더 ‘큰 일’을 행합니다. 하나님의 ‘큰 일’이란 우람한 대형건물을 건축하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세속화된 교회, 타락한 교회 자체를 다시 짓는 일입니다. 최근에 새로 선출된 아르헨티나 출신의 교황도 즉위명을 그의 신앙과 삶을 본받아 ‘프란체스코’라고 공표했더군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겠다”면서.
자타(自他)와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너무 세속화된 우리의 신앙 내지 교회의 신앙과 저 프란체스코 성인의 신앙 사이에 있는 가치관의 차이나 괴리나 이질감은 과연 무엇일까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이 풀려야만 목하 ‘야유의 대상이 된 기독교’의 숙제도 풀릴 것입니다.
성경은 신앙인인 우리를 때론 ‘종(servant)’이라고, 때론 ‘신부(bride)’라고,
때론 '어린아이'라고, 때론 ‘군사’라고, 때론 ‘친구’라고 표현 내지 비유하며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 및 충성할 때는 ‘그리스도의 종’ 같은, 사랑할 때는 순결한 영혼을 가진 ‘그리스도의 신부’ 같은, 천진한 마음이나 믿음을 위해서는 욕심이나 사심 없이 단순하게 어버이를 의지하는 '어린아이' 같은. 복음 일선에서의 사역에는 ‘그리스도의 군사’ 같은, 성숙해야 할 때는 ‘그리스도의 친구’ 같은 그런 신앙인격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문화나 문명은 날로 스스로 '유식한 어른'이 되어 가는데, 언제까지나 이기적인 축복타령만 일삼는 '젖 먹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인이나 신앙풍토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우리 몫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이, 그런 성숙한 신앙인격으로 그리스도를 묵묵히 따라가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선 나무십자가를 지고 가난하고 누추한 동쪽 낮은 곳을 향해 가시는데, 우리는 금십자가를 목에 걸고 부와 권력과 호사가 있는 서쪽 높은 곳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다가 요나처럼 ‘큰 물고기’의 뱃속이나, ‘자기 바벨탑’이나 ‘젖 먹는 어린아이’의 뱃속에 스스로 갇혀버리는 자가당착의 질곡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아간,
남달리 고난이 많았던 그래서 더 겸손했고 더 신실했던
사도바울은 ‘자기 십자가’ 그 고난의 신비를 이렇게 설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8:17-18)
그렇습니다.
고난은 쓰지만,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습니다.
겨울이 없으면 봄도 없는 것처럼,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고난은 값싼 감상(感傷)이 아닙니다.
이론이나 귀로만 듣는 객관적 은혜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고난이 ‘내 것’ 되고 ‘내 은혜’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그리스도의 자유’가
또한 ‘내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자기 해체를 통해 우리가
‘세상의 빛’도, ‘세상의 소금’도,
‘그리스도의 향기’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거기 내재한 고난의 신비이자 성령의 비밀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부탁하신
‘자기 십자가‘,
거기 내재한 고난의 신비이자 성령의 비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심오한 고난의 미학(美學)과
성숙한 축복에의 비밀이 바로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기도드리는 ‘주기도문’의 내용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나라와 뜻이
진정으로 이 땅, 이 세상에서도
구원을 통해
어서 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린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응분의 ‘자기 십자가’를
기쁘게 감당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우리 몫의 ‘자기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어디에 있을까요?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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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의 기도-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서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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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우리는
그렇게
성공하기 위해 조급히 굴며,
또한 그렇게
사업적일까.-
*헨리 데이빗 소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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