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 차례 오르기도 했지만
지금은 세상을 떠난,
20세기 일본의 작가 엔도 슈가쿠(遠藤周作)의
소설「침묵」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 우리에게
여전히 실존적인 숙제를 던져줍니다.
인간들이 억울하고 불의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창조주’라는 하나님은 과연 어디 계시는가?
그의 양들이 처참한 박해를 당하고 있을 때,
‘선한 목자’라는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어디 계시는가?
왜 침묵만 하고 계시는가?
정녕 계시는가? 정녕 살아계시는가?
「침묵」은, 17세기 당시 쇄국정책을 쓰던
일본의 규슈 나가사키 지방에서 자행된 역사적인
가톨릭 박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포르투갈의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되어 33년 동안이나 교구장으로써 성직자들과 신자들을 묵묵히 이끌던 신실한 신앙인이자 신학자였던 페레이라 신부가, 땅바닥에 큰 구멍을 판 뒤 그 구멍에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놓는 이른바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배교했다는 보고서가 교황청에 들어옵니다.
존경하는 스승인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 행위를 차마 믿을 수 없었던 제자 로드리고 신부 일행은 사실을 확인 및 선교 사역을 감당하고자 일본으로 향하고, 도중에 만난 일본인 기치지로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 잠입하는데 성공해서 은밀하게 선교 사역을 진행합니다.
그러나 교활하고 비굴한 인물 기치지로와의 인연은 악연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넘긴 유다처럼 그가 결국 로드리고 신부를 관헌들에게 팔아넘겨버리기 때문입니다.
당국에 체포된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를 강요당합니다. 배교의 절차는 관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그려진 목판 내지 구리판인 ‘후미에’를 발로 밟고 지나가는 것. 물론 스승 페레이라 신부를 직접 만나지 못해서, 아직 배교 사실조차 확인하지 못했던 로드리고 신부는 관헌들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단호히 거절합니다. 문제는 로드리고 신부가 배교하지 않으면 대신 다른 신자들이 가혹한 고문을 당하면서 처참하게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실인즉 그때 옥사 너머에서 때론 높게 때론 낮게 들려오던 신음소리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린 채 입과 코 등으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신자들의 신음소리였습니다. 스승인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 직전에 들었던 신음소리이기도 합니다.
외국인이자 신부인 자신이 배교해서 고문을 당하는 신자들을 살릴 것인가? 자기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처참하게 죽어가는 신자들을 모른 척 외면할 것인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참혹한 순교자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들의 고통과 신음과 절규에 여전히 침묵만 하시는 하나님! 이 처참한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은 과연 어디 계시는가? 그리스도는 과연 어디 계시는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로드리고 신부는 고뇌와 회의를 앓으며 주님께 묻고 또 묻습니다. 주님의 침묵을 원망하면서. 그런 로드리고는 그의 스승인 페레이라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배교 직전에 주님의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 후 로드리고 신부는 페레이라 신부가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배교했던 것처럼 그 역시 배교합니다. ‘인간의 가장 높은 이상과 꿈으로 가득 차있다’고 굳게 믿어온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성화를 발로 밟은 것입니다.
-발에 둔중한 아픔을 느꼈다. … 이 발의 아픔. 이때 밟아도 좋다고 목판 속의 그분은 신부를 향해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은 바로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아픔을 나눠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신부가 성화에다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닭이 먼 곳에서 울었다’라고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한 수제자 베드로의 귀에 들려왔던 그런 닭울음소리였겠지요.
배교한 저 로드리고 신부에 대해 교회법을 집행하는 교황청의 견해 및 처분과 인간 우리의 ‘심령까지도 통찰하시는 하나님’의 견해 및 처분은 다를 것입니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피차 부족한 죄인들인 우리와의 차이처럼 말입니다. 최종 판단은 오직 하나님의 몫이니까 겸손하게 맡기고, 우리는 여기서 작가의 견해일 수 있는, 로드리고의 소신도 들어봅시다.
-성직자들은 이 모독적인 행위를 몹시 책할 테지만, 나는 그들을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코 그분을 배반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 내가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로드리고는 그 후 스승 페레이라처럼 평범한 일개 일본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래도 그에게 고백성사를 간청하는, 자기를 관헌들에게 팔아넘겼던 기치지로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써의 구원과 미덕을 강조하는 의미가 되겠지요.
* * * *
그럼 여기서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린 채로 부르짖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절규를 다시 들어봅시다.
-제육시(*낮 12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3시)까지 계속되더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태복음27:45-46)
그러니까 말을 바꾸자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침묵만 하고 계시나이까?’
그런 의미가 됩니다.
무심한 아니 차라리 야속한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원망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디 계시는가? 왜 침묵만 하고 계시는가? 정녕 계시는가? 정녕 살아계시는가?
그런 실존적 고뇌이자 회의가 됩니다.
바로 저 페레이라 신부가 앓았고, 로드리고 신부가 앓았던 그런 고뇌이자 절규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약시대의 신앙위인이자 선지자였던 다윗이 이미 토로했던 고뇌이자 절규이기도 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시편22:1-2)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들의 예언은 늘 이중적(二重的)으로 언급이 됩니다.
당시로서는 선지자인 다윗 자신이 처한 수난의 사건이지만, 미래적 내지 계시적으로는 그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차 세상에 오실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예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 우리는 그것이 신앙의 문제이든, 병고이든, 생활고이든, 배신 같은 인간관계이든, 몸이나 마음이나 생활이 극한의 고통이나 절망에 처하면 누구나 다윗처럼 저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저 부르짖음은 인간의 고뇌를 집약시킨 대표적 절규인 것입니다.
그럼 왜 세상에 오신 메시아라는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인간 다윗과 똑같은, 우리와 똑같은 절규를 토로하고 허무하게 죽어야만 했는가? 겟세마네 동산이나 십자가에서 왜 그렇게 평범한 인간들처럼 약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이셨는가?
하나님처럼 의연하게, 슈퍼맨처럼 통쾌하게, 못 박혀있던 십자가를 당장에 박살내고 보란 듯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버려야만 하지 않았는가? 정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대속적 고난’이 아닙니다. ‘참 인간’은 아니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역사적(인간) 예수'가 곧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육신(成肉身)하신 한 몸이라는 것. ‘참 신’이자 ‘참 인간’이라는 것. 따라서 인간적으로 고통을 앓는 약한 모습이 되레 ‘참 신’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참 육신’을 입었다는 확실한 반증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래야만 진정한 ‘대속물’이 될 수 있습니다. ‘육신’의 고통을 모르는 천상의 영체(靈體)는 하나님의 성령이든, 천사이든, 미혹하는 유령이든, ‘대속물’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참 인간’의 모습으로 죄인인 인간 우리의 죄악이나 저주나 고통이나 절망이나 절규나 죽음 등을 액면 그대로 짊어지고 가야만 진정한 대속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죄악 역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정의이자 창조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선 스스로
‘대속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10:45)
그리고 ‘죽었다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내용의 말씀도 생시에 제자들에게 자주 하셨고,
친히 이런 비밀한 말씀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한복음10:17-18)
따라서 ‘십자가의 무능’은 무능이 아니라 인간 우리의 죄악을 액면대로 대속하기 위한 ‘버릴 권세’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얻을 권세’를 통해 부활하신 것입니다.
저 다윗의 절규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부르짖은 것도 그분이 회의 내지 절망했거나, 고통이 두렵고 무섭거나, 그분의 신앙이 약해져서 그런 절규를 부르짖었던 것이 아닙니다. 죽음 자체가 인간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듯이, 절규 자체도 인간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절규’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절규는 절규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해답이 있는 것입니다.
사흘 후의 부활이 그것입니다.
사흘 후의 응답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인간 우리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와 진노의 율법적 성취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 우리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복음적 용서와 구원과 사랑의 성취이자 증명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기간인 ‘사흘’은 우리가 인내해야 할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그 기간에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이미 계시해주신 구속사(救贖史)를 성취하기 위한 고통입니다. 따라서 그 ‘사흘’은 사람이나 사건에 따라 ‘3개월’이 될 수도 있고, ‘3년’, ‘3십년’, 아니 ‘3천년’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곧 ‘카이로스’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구속사적 개념이니까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응답은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있다는 것. ‘죽어도 사는’ 부활은 있고, 천국은 있다는 것입니다.
걸출한 기독교 문인이자 학자인 C. S. 루이스 교수의 논증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사기꾼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 둘 중의 하나입니다.”
대속의 죽음이 사실이라면 신비한 부활도 승천도 사실이자 진실이라는 것. 빈 몸으로 참 인간에의 ‘길과 진리와 생명’을 설파하다가 스스로 형극의 길, 죽음의 길을 가는 ‘사기꾼’이 있습니까? 부활하지도 않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했다고 증언하다가 죄다 형극의 길, 죽음의 길을 가는 ‘사기꾼들’이 있습니까? 순교의 역사는 피와 진심으로 써지는 것을!
따라서 ‘사기꾼’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나 ‘부활’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비밀’인 성경이 절로 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또한 자신도 형극의 길, 순교의 길을 갔던 사도 바울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저 페레이라 신부나 로드리고 신부에게, 아니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유식한(?) 혼돈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오늘도 이렇게 ‘죽어도 사는 삶’을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서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린도후서15:19-22)
그렇습니다.
부활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자, 영원한 삶의 시작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도 사는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겐
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영원한 희망과 영원한 평안과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그래야만 합니다.
그것이 현재부터 사는 ‘하나님의 나라(天國)’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환난이나 고통이나 실패,
참혹한 박해나 죽음마저도 이길 수 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구원과 해답의 비밀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될 수 있기를!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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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는,
신약성경에서
염세주의적인
그 어떤 말씀도 찾을 수 없다.-
*블랙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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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 … 자신이 부활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어떠한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고,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믿지도 않았음은 분명하다. …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된 때는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였으며, 이로 인해 자신들의 실망과 절망이 즐거운 믿음으로 변화되었음을 발견했다.
자신들이 만났던 살아 있는 인물은 진정 육신의 형태의 나사렛 예수였다. 그는 유령도 아니었으며, 환영(幻影)도 아니었다. 그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으며, 그를 만졌고, 그와 함께 식사도 했다. 동시에 예수님의 몸은 부활 이후에, 이전의 몸과는 다른 것이 되었다. 그는 닫혀 있는 문을 그대로 뚫고 나갈 수 있었다. 그는 홀연히 나타나기도 했고, 또한 홀연히 사라지기도 했다. 바울은 후에 이같은 몸을 ‘신령한(spiritual)’ 또는 ‘영화롭게 된(glorified)’ 몸이라고 불렀다.-
*에그류 노르틀란드*
-‘부활의 증인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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