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카라마조프 가(家)'의 다섯 유형의 인간형

이형선 2013. 3. 11. 11:07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죽기 몇 달 전에 완성한,

그의 최고의 소설이자 세계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카라마조프 가(家)의 형제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의 축소판일 수도 있는 그 집안에는 다섯 유형의 인간형이 공존합니다.

 

 

첫째 유형은,

러시아 지방도시에서 술집이나 대금업 등으로 돈을 번, 물욕이나 정욕 등 원색적 탐욕의 상징일 수 있는 아버지 표도르입니다. 그는 첫째부인이 도망을 가버리자 온순한 고아 출신의 여자와 재혼합니다만 그녀와도 사별(死別)을 합니다.

둘째 유형은,

첫째부인에게서 난 육군 장교이자 아버지를 증오하지만 그러나 아버지처럼 역시 방탕한, 부전자전의 상징인 장남 드리트리입니다.

셋째 유형은,

사별한 둘째부인에게서 난 냉철한 이성(理性)을 소유한 무신론자인 차남 이반입니다. 그가 역설하는 ‘대심문관의 전설’을 통해 나타난 그의 사상이 그렇듯이, 그리스도를 비판 내지 비난하는 무신론적인 사회주의나 합리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넷째 유형은.

어릴 때부터 수도원에 들어가서 살았던, 카라마조프 집안에 흐르는 죄악 내지 세속의 피를 극복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노력하는, 신앙과 구원의 상징인 삼남 알료사입니다.

다섯째 유형은,

아버지가 백치 여자를 겁탈해서 낳은 사생아이자 하인으로 살아온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원한의 뿌리가 깊으면서도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칼을 가는, 교활한 기회주의자의 상징인 사남 스메르챠코프입니다.

 

 

돈과 두 여성을 둘러싼 애증과 탐욕 속에서 아버지와 장남,

그리고 형제들끼리 서로 복잡하게 얽히는 갈등 구조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 표도르가 누군가에 의해 살해를 당하고 맙니다.

범인은 넷째인 스메르챠코프입니다만, 그는 그날 밤 간질병 발작을 앓았다는 이유로 알리바이가 성립되어 혐의에서 벗어납니다.

 

아버지가 또 재혼을 하면 아들들에게 상속될 유산이 없다는 넷째의 말에 맞장구치며 아버지의 죽음을 은근하게 원하며 사주했었던 무신론자인 둘째는, 넷째를 추궁해서 자초지종의 자백을 받아낸 후 법정에서 그가 범인임을 증언하지만 그것이 액면대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습니다. 그 후 범인인 넷째는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해버립니다.

 

셋째인 알료사를 통해 넷째의 그런 비보를 전해들은 둘째는 그리스도인인 알료사의 영향을 받아 비로소 양심 내지 미덕의 세계에 조금씩 열리면서, 실인즉 살인을 교사한 셈인 자기가 진범이라고 자백하고 싶은 강렬한 죄책과 충동을 느끼며 이성적으로만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결국에 범인으로 지목되어 당국에 체포된 사람은, 아버지 표도르와 그루센키라는 여인을 두고 질투와 증오 속에서 서로 반목했던 첫째입니다. 그런 대립의 정황이 그를 유력한 피의자로 몰아간 것입니다.

그는 존속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징역 20년을 선고받습니다만 평소에 항상 아버지를 미워하며 죽이고 싶어 했던 첫째는, 고난과 고통의 십자가를 통해 곧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알료사의 사랑과 중재에 심령이 열리면서, 마침내 스스로 범인이 되어 선고 형량을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말합니다. 아버지를 직접 살해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시베리아 유배의 길에 오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서적 언어로 접근하자면, 부전자전의 상징일 수 있는 첫째는 장남답게(?) 진정한 인간의 구원은 대물림 되어온 인류의 조상인 아담의 피, 카인의 피, 그리고 아버지인 표도르의 피 같은 이미 타락한 '육신의 피, 육신의 혈통'에 의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한 경우가 되겠지요. 죄인의 피가 흐르는 자기 속의 역시 탐욕적인 타락성 내지 죄악성에 절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거기서 창조주 ‘하나님의 비밀’이자 순결한 ‘언약의 피, 언약의 혈통’인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피 그 구원의 비밀에, 그 심령의 비밀에 열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의 괴수(?) 같은 살인범임을 자인하고, 스스로 응분의 고난을 통한 구원의 길 곧 시베리아 유형의 길에 오른 것입니다.

그럴 것이 그는 아버지를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성경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리스도)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한일서3:15-16)

 

 

남을 미워하거나 증오하는 마음 그 자체가 ‘살인’이라는 죄악과 동일시되어 있습니다. ‘간음’이라는 죄악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음욕을 품는 마음 그 자체가 ‘간음’이라는 죄악과 동일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행동’을 일으키는 그 내적 동기가 곧 ‘생각’ 내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행동 이전의 세계인 ‘심령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그만큼 윤리의식도 책임의식도 깊고 높은 양심의 세계인 것입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5:27-28)

 

 

그렇다면 세상에서 ‘살인’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고,

‘간음’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원적으로, 태생적으로 ‘죄인’인 것입니다.

아버지 표도르를 미워하거나 증오했던 아들들 역시 모두 ‘살인자’인 것입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아버지와 같은 방탕의 삶을 그대로 답습한 아들이라면 더 악한 ‘살인자’일 수도 있습니다.

 

 

‘만인은 만인에게 죄인입니다.’ 인간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주기도문’을 통해 가르쳐주신 것처럼 ‘우리의 죄(our debtors)’(마태복음6:12)라는 연대적 내지 공동체적 운명성에 먼저 열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이해 내지 가족 이해를, 하나님 앞에서는 가증한 아버지도 아들인 우리도 ‘모두가 죄인이다’, 그런 시각에서 접근해야만 구원의 문이 열릴 수 있었을 텐데 가증한 아버지는 악이고 그의 타락한 피가 역시 몸속에 흐르고 있는 아들인 우리는 아버지를 정죄 내지 심판해도 좋을 만큼 스스로 선이라고 생각하거나 의인시하는 그 자체가 엄청난 교만이자 죄악이자 착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끝내 구원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살인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아버지의 죽음 및 불행이 가족이라는 혹은 사회라는 ‘우리’ 내지 ‘공동체’의 죽음 및 불행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심지어 ‘원수 갚은 것조차도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합니다.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인 ‘원수’를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바로 ‘피해자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증오나 복수의 칼을 갈면 그 자체가 내 심령, 내 손에 더러운 피를 먼저 묻히고 있는 경우가 되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최고의 증오나 복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물론 그게 우리 마음대로 안 되니까 늘 숙제이자 고통입니다만, 그래서 또한 주님께서는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신론자인 둘째처럼 이성적(理性的)으로 몸부림친다고 해서 풀어질 문제는 이미 아니기 때문입니다. 근원적으로 영적(靈的)인 문제라는 것. 그래서 기도를 통해 곧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만 비로소 풀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태복음5:43-45)

 

 

‘심은 대로 거두는’ 인생 여정에서,

저 다섯 유형의 인간형 중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느 쪽 인간형일까요?

그리스도인인 알료사의 영적 스승인 조시마 사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은 그 전부를,

 그 속에 있는 모래알 하나조차도 사랑하라.

 그러면 그대는 그 모든 것 속에서 거룩한 신비를 인식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미운 사람도, 은혜를 모르는 사람도, 악한이나 원수조차도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자 거듭나야할 구원의 대상이라는, 그런 마음 내지 시각에서 인간 이해를 시작해야만합니다. 하찮은 피조물인 ‘모래알 하나조차도’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그런 마음 내지 시각에서 자연 이해를 시작해야만합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 속에서 거룩한 신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창조주 하나님의 신비를 발견하지 못하고, 인간 자의적인 증오와 심판으로 인해 되레 불행한 죽음과 악순환의 사슬을 발견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그래서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악행을 반면교사로 삼아 되레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알료사나 뒤늦게나마 응분의 고난을 통한 구원의 길에 열린 첫째는 그래서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이나 역경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시험이나 역경이 남보다 어렵고 크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원하시는 믿음이나 심령의 분량의 그릇이 남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역경은 극복하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역경은 더 큰 그릇이 되라는 은유적 메시지인 것입니다.

 

가족이든 남남이든 '악연'도 극복하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의 비밀이자 악연이라는 운명의 비밀을 절실하게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서' 운명이 거듭나야만 살 수 있다는 구원의 비밀을 알고,

그리스도의 마음과 삶을 닮은 더 큰 그릇이 되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정의 곧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친히 그리고 분명히 '원수'를 응징하신다는 것입니다. 

금세가 아니면 내세에서라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긴 안목의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때,

우리는 더 길게 인내할 수 있고, 더 큰 심령의 평안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더 큰 그릇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하고 그분의 도우심에 맡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손'보다 '내 손'의 증오나 복수나 심판이 먼저 나가면,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나 그 때를 기다리지 못한 인간 자기의 교만이 됩니다.

'감정의 동물'이라는 인간 우리의 즉흥적 내지 일시적인 감정이

하나님의 공의는 아닙니다. 진정한 복수도 아닙니다.  

스스로 속아서는 안 됩니다. 교활한 악령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결과는 늘 불행이 불행을 낳고, 악연이 악연을 낳는

'나의 불행, 우리의 불행'으로 떨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든 불행과 악순환의 사슬로부터 진실로 자유케 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로마서12:17-20)

 

 

 

 

                                                                               (Ω)

 

 

 

 

-----------------------------------------------------------

 

 

 

 

 

       (♣)

 

 

 

-화가 났을 때,

 사람들이 서로에게 갖는 생각들은

 얼마나 거칠고 잔인한가!

 천번도 넘게 해치고 죽인다.

 우리는 이런 성급한 죄들을 쉽게 잊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

 

 

 

 

                                      *찰스 스펄전*

 

 

 

 

---------------------------------------------------

 

 

 

 

 

       (♣)

 

 

 

-교회의 탁월함은

 교인 수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순결함에 있다.-

 

 

 

 

                      *존 칼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