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천하의 '효자'와 '불효자' 사이

이형선 2013. 2. 25. 11:46

 

   한나라 무제 때, 천자를 근거리에서 수행하며

   천자의 언행을 기록하는 태사령 직위에 있었던 사마담(司馬談).

   그러나 천자가 태산(泰山)에 올라가서 비밀리에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드리는

   중요한 봉선(封禪) 행사의 수행에서 사마담은 당시 외지인 주남에 있었던 때문인지 여하간 제외됩니다.

 

   낙양에 남게 된 사마담은 그것을 큰 굴욕으로 생각한 끝에 분을 앓다가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죽고 맙니다. 죽기 전에 그는 아들 사마천에게 이런 유언을 남깁니다.

 

   -천자께서는 천세의 대통을 이어 받아 태산에서 봉선하는 예를 행하고 계신다. 내가 이에 수행하지 못함은 천명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내가 죽으면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될 것이다. 태사가 되거든 내가 저술하려고 했던 것을 잊지 마라.

대저 효도란 어버이를 섬김으로 시작하여 임금을 섬기고 몸을 세워 그 이름을 후세에 남기고 부모를 나타나게 함으로써 끝나는 것이다.-

 

 

   이상은 아버지가 죽은 3년 후에 태사령이 된 사마천(司馬遷)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아버지가 ‘저술하려 했던 것’ 곧 「사기(史記)」를 저술하며 그 서문에서 술회한 내용입니다. 동양 내지 유교의 전통적인 충효(忠孝) 사상이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후 사마천은 무제의 ‘괘씸죄’에 걸린 그러나 의로운 장군이었던 이릉(李陵)을 신하들 중에서 유일하게 나서서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사고 그래서 결국 궁형(宮刑)에 처해지고 맙니다. 예나 지금이나 타의에 의해서 생식기를 거세당하는 형벌은 치욕이자 굴욕입니다. 그러나 사마천은 죽지 않습니다. 저 ‘아버지의 유언’이 그를 살게 했고, 그래서 그는 굴욕을 이기고 살아남아서 마침내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룹니다. 도합 130권에 이르는「사기(史記)」를 완성한 것.

   자기를 향한 ‘아버지의 뜻’이 자기가 세상에서 당한 치욕이나 환난보다 더 소중한 가치이자 목표였기에 그는 오히려 살아남아서 후세에 그 부모의 이름과 뜻한 바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는 과연 천하의 ‘효자’였습니다.

 

 

   성경에서도, 물론 어버이에 대한 효도를 강조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애굽기20:12)

 

 

   바로 ‘십계명’ 중 제5계명입니다.

   제4계명까지가 하나님과의 관계인 대신(對神) 계명이고, 나머지가 사람과의 관계인 대인(對人) 계명입니다. 그러니까 대인 계명 중에서 그 첫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선택이 아닙니다. 명령입니다. 자기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면, 사랑하지 못하면, 다른 어른이나 이웃 등 인간 그 누구도 제대로 공경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사막처럼 메마르고 야수처럼 거친 불효자나 패륜아는 그래서 자기 자신부터가 먼저 불행합니다. 그런 심령에는 누구도 씨를 뿌릴 수도, 나무를 심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잠언15:20)

 

 

   그렇습니다. 부모를 업신여기는 자는 스스로 ‘미련한 자’라고 자기 선언을 하는 어리석은 행태인 것입니다. ‘하늘에 침 뱉기’와 같아서 그 ‘침’이 결국은 자기 얼굴에 떨어지기 때문이겠지요.

   ‘잘되면 내 탓이요 못되면 조상 탓이다’는 우리의 속어도 있습니다만, 세상에서 잘됐든 못됐든 신(神)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듯이, ‘하나님의 대리자’인 부모님과의 관계 역시 공경하고 사랑해야할 관계임은 불문가지이자 사람으로써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나아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인

   인간 우리의 영적 신분을 이렇게 설파하고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Abba)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로마서8:14-17)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부모님 앞에서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잘난 자녀도, 별볼일 없는 못난 자녀도 다 평등합니다. 비교의식? 열등의식? 다 필요 없습니다. 건강한 자녀도 병약한 자녀도 다 같은 귀한 ‘내 자식’이요 ‘내 사랑’입니다. 차라리 건강하고 잘난 놈은 ‘지가 알아서 잘 사니까’ 오히려 관심 밖에 있을 수가 있습니다. 못나고 병든 ‘작은 자’에게 관심이 더 있고 그래서 위하여 더 많은 기도를 하는 게 모든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랴! 우리의 대속(代贖)을 위하여 친히 저주의 십자가에서 대신 죽기까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랴!

 

 

   여기서 우리는 저 사마천의 목표나 가치보다

   더 크고 영원한 숙제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저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의 효도’란 무엇일까?

   ‘하나님 아버지를 섬김으로 시작하여, 세상의 어버이를 위시하여 이웃을 섬기고 몸을 세워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후세에 유산으로 남기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나게 함으로써 끝나는 것.’ 그것이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각자에게 자기 몫으로 주어진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다 이루었다”(요한복음19:30)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세상에서 당하는 갖가지 환난이나 굴욕 등을 이기고 의연하게 살 수 있느냐, 그것이겠지요.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크고 작은 하나님의 뜻 내지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 모두에게 크고 작은 ‘달란트’ 곧 ‘재능’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물론 재능이나 그릇이 다 동일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는 큰 그릇도 작은 그릇도 필요하고, 금그릇도 질그릇도 필요한 것이니까요. 전투에는 장군도 필요하고 졸병도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분수나 그릇에 합당하도록, 어떤 사람에겐 ‘다섯 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겐 ‘두 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겐 ‘한 달란트’를 각각 맡겨주십니다. 그냥 ‘준(give)’이 아닙니다. ‘맡긴(entrust)’ 것입니다. 그것으로 ‘열심히 일하라(장사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실인즉 ‘빈손으로 세상에 와서 빈손으로 가는 인생’인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자녀들까지 포함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맡긴 것입니다. 기도하며 최선을 다할 수 있을 뿐,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는 소유권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생(生)과 사(死) 자체부터가 그런 것처럼.

   여하간 저 ‘달란트 비유’를 통해 우리는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설파한 것처럼,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삶에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이 있다’는, 잘 알려진 그리스도인의 ‘직업소명론’을 상고해 볼 수 있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을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그것으로 장사하며’ 열심히 자기 몫의 삶을 삽니다. 자기 몫의 직업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성실한 삶을 삽니다. 그래서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열매’로 다섯 달란트를 더 남긴 것처럼 그 역시 두 달란트를 더 남깁니다. 그래서 주님께 저 두 사람은 동일하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태복음25:23)라는 칭찬과 함께 응분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효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있었습니다. 남들에겐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주고, 나에겐 왜 한 달란트만 주는 거야? 불공평한 하나님! 그런 상대적인 원망이나 불만이나 시기심이 컸던 것일까요? 아니면 ‘이깟 한 달란트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거야? 나 같이 별볼일 없는 하류 인생이!’ 그렇게 의욕 상실을 앓으며, 비관 내지 자학을 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세상에서 돈 곧 ‘달란트’로 ‘장사’하는 것은 그 자체가 탐욕으로 인도하는 죄악이니까 그런 세상을 멀리하고 금욕적으로 살고자 그랬던 것일까요? 그는 그 한 달란트로 ‘장사’를 하지 않고, 아예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둡니다. 그리고 ‘타국’ 곧 하늘나라에서 돌아온 주님과 ‘결산’할 때 그는 이렇게 그 연유를 들어 변명합니다.

 

   -주인이여, 당신을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마태복음25:24-25)

 

 

   한 달란트 받은 자가 그 한 달란트를 장사하다가 다 날려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는 성공한 인생도 아니지만 실패한 인생도 아닙니다. 본전인 ‘한 달란트’는 분명히 그대로 가지고 왔으니까요. 그러나 ‘주인’ 곧 하나님 내지 그리스도의 관심은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 등을 더 많이 번 그 액수나 양의 상대적 비교의식에 있지 않았습니다. 받은바 사명에 순종해서, 받은바 말씀에 순종해서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착하고 충성된(good and faithful)’ 그 심령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노력했다가 설령 본전마저 다 잃고 병까지 들어 실패한 ‘거지 나사로’나 ‘욥’ 같은 인생이 되었다 쳐도, 심령의 중심을 훤히 통찰하시는 하나님은 그래도 그를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시며 축복하셨을 것입니다. 실인즉 그래서 ‘고난 받은 종의 대명사’ 욥은 배전의 축복을 받았고, 거지 나사로는 역시 ‘낙원’의 축복을 받았으니까요.

 

 

   주님께선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종’이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되레 불행한 것은,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그것이 아주 잘못된 이해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아주 이기적인 ‘굳은 사람(a hard man)’으로 이해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오해와 편견이 단 한 번뿐인 그의 인생을 천하의 ‘불효자’로 만든 결정적 요인이었습니다. 저 '굳은' 곧 헬라어 '스클렐로스'는 '거친, 강퍅한' 의미를 함께 가집니다. 저 단어가 야고보서 3:4절에서는 바람과 합성어가 되어, '스클레론 아네모스' 곧 '광풍(狂風)'이라고 번역되어 있기도 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돈만 밝히는 수전노처럼 몰인정하고 ‘굳은 사람’입니까?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폭군처럼 거칠고 강퍅한 분입니까? 광풍처럼 제멋대로만 설쳐 대는 '두려운' 통치권자입니까?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참새 한 마리의 죽음’까지를 포함해서, 만물의 생사화복을 심고 헤치고 계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자 선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거칠고 강퍅한 사탄의 ‘광풍’을 오히려 재우고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자 긍휼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고 그 사랑과 헌신과 희생의 삶이나 가치나 의미 그 진면목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스스로의 심령이 ‘악하고 게으른’ 때문에 하나님조차 ‘악하고 게으른’ 하나님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내가 ‘선글라스’를 쓰면 하나님도 세상도 다 파랗게만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과연 편견의 눈엔 편견만 보입니다. 

 

 

   신앙관이 잘못되면 인생관이나 가치관도 잘못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아주 이기적인,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실하게 열심히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며’ 살리는 선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되기를 오늘도 바라고 계십니다. 짐승들도 자기나 자기 새끼들은 지극 정성으로 사랑할 줄 압니다. 이기적인 사랑은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생존 및 공존의 진리를, 이타적인 사회공동체의 미덕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짐승이나 동물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은 이기적인 세상(인간) 내지 짐승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분별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참 인간' 곧 복된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이웃을 사랑하려면 돈도 빵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이웃을 사랑하려면 성경이나 신학 등 영(靈)의 지식도 필요합니다. 쓰러진 이웃을 사랑하려면 그를 업어줄 수 있는 육신의 건강도 필요합니다. 한 마디로, 보다 많은 이웃을 돕고 사랑하며 살리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도 하고, 일도 하고, 절제도 하고, 육신의 건강도 살피며, 청교도들처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영육 간에 성실한 삶,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오늘 우리의 삶의 모습은

   ‘효자’일까요?

   ‘불효자’일까요?

   ‘착하고 충성된 종’의 모습일까요?

   ‘악하고 게으른 종’의 모습일까요?

   우리의 과거적 환경이나 여건이 가난하고 불우해서,

   혹은 부자이거나 지체 높은 부모님을 만나지 못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많이 배우지 못했다 쳐도,

   단 ‘한 달란트’를 받은 ‘별볼일 없는’ 인생이다 쳐도,

   그나마 있는 그것에 감사하며,

   ‘선하고 신실한’ 삶을 살고자하는 중심으로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주님의 칭찬과 함께

   더 큰 축복도 주어질 것입니다.

   심령에 ‘천국’을 소유한 자는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고,

   왼손이 없어도 오른손이 있는 것에 감사하며,

   늘 영원한 희망을 품고 살 수 있는 법이니까요.

 

 

   독신으로 살다간 사도 바울의 생애는,

   고난과 핍박과 병고로 점철이 되어 있습니다.

   세상적인 투정으로 비약을 시켜보자면,

   ‘위대한 하나님의 종’인 그에게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은

   그런 팔자 내지 운명을 주신 불공평한 하나님은

   참 야속한 하나님, 굳고 거칠고 강퍅한

   그래서 아주 몰인정한 하나님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심령에 ‘천국’을 소유한 그는

   되레 이렇게 담대하게 신앙고백을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린도후서6:8-10)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으며 살았던 사도 바울

   그는 과연 ‘착하고 충성된 종’이었습니다.

   천하의 ‘효자’였습니다!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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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일상생활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고,

    자신과 타인 안에 있는 죄를 다룰 줄 알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면서

    복된 미래로 나아가는 인간 공동체를 가리킨다.

    이 모든 일에는 환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유진 피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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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에 있어서 절망은

    우리가 주님을 완전히 신뢰하는가,

    그분께 우리의 의지를 완전히 맡겼는가,

    그것을 가늠하는 척도가 됩니다.

 

    그런 시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이 기뻐하시며 우리와 함께 해주실만한지와,

    순종하는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믿으며

    끝까지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면서,

    우리가 우리의 뜻을 언제나 아버지께 바칠 수 있는 지의

    여부를 확실히 알게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이 진정 사랑이고,

    그분이 우리를 항상 어둠에서 이끌어내어

    광명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혹독한 시련의 시간을

    주님께선 마침내 커다란 보상으로 갚아주십니다.-

 

 

 

                                                        *바실레야 쉴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