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우리 민족의 고난이자 불행인 6·25 전쟁의 비극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 이른바 ‘전후(戰後)세대’입니다만, 전쟁이 남긴 폐허와 가난의 아픔이나 불편은 당연지사처럼 온 몸으로 겪으며 살아온 시대의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날에나 별식으로 맛볼 수 있었던 ‘고등어 한 손’이라는 상징적인 추억과 그것으로도 자족하며 행복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동심이 때론 그립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문학의 고전이 된 하근찬의 소설「수난이대(受難二代)」를 통해 그 시대의 고난과 아픔과 좌절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나가고자 하는 삶의 애환을 다시 읽어봅시다.
박만도는 전사자도 행방불명자도 많은 전장에서 삼대독자인 진수가 살아서 돌아온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고, 천하라도 얻은 듯이 기쁜 마음으로 정거장으로 마중 나갑니다. 아들을 위해 잔치하고자 미리 장거리에 들러 ‘고등어 한 손’을 사들고서.
박만도는 일제식민치하에서 남양군도의 한 섬에 징용으로 끌려가서 비행장 건설공사를 하던 중, 연합군 비행기의 공습을 피하다가 굴 안에서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는 바람에 왼쪽 팔을 통째로 잃은 사람입니다.
정거장.
이윽고 기차는 들어오고.
아버지 박만도 앞에 나타난 아들의 모습은 예전의 건장한 청년의 모습은 이미 아니었습니다. 양쪽 겨드랑에 목발을 짚은, 한쪽다리가 통째로 절단된 상이군인이었습니다.
기가 막힌 박만도는 ‘속옷을 뒤집어 이를 잡고 있던’ 주모가 술을 파는 주막집에 들러 신음하듯 ‘거들빼기로 술 석 잔을 해치우고’ 아들에게 ‘국수 한 그릇’을 말아 먹인 후, 아들을 앞세우고 집을 향해 논두렁길을 걸어갑니다.
-“아부지!”
“와?”
“이래 가지고 나 우째 살까 싶습니더.”
“우째 살긴 뭐 우째 살아.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사는 기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
“나봐라. 팔뚝 하나 없이도 잘만 안 사나. 남 봄에 좀 덜 좋아서 그렇지 살기사 왜 못살아.”-
그렇게 아버지는 되레 아들을 위로합니다. 그리고 ‘외나무다리’가 나오자, 다리가 성한 만도는 건너가기 어려운 아들을 등에 업고 조심조심 한 발 한 발 다리를 건너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하나 뿐인 아들의 다리를 꼭 안고’, 아들은 한 손이 없는 아버지가 들 수 없는 고등어와 목발을 든 두 팔로 ‘아버지의 굵은 목줄기를 부둥켜’안습니다.
지난날 혼자 건널 때는 술기운에 실족해서 개울에 빠진 적도 있었던 그 외나무다리였지만, 아버지는 ‘용케도 몸을 가누며’ 무사히 건너갑니다. 전장에서 살아서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한편으론 고마운, ‘삼대독자’인 아들을 위해 더욱 조심조심했기 때문이겠지요.
두 팔로 ‘아버지의 굵은 목줄기를 부둥켜안는’ 저 아들의 모습은
또한 신앙인인 우리 모두의 모습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여기서 저 ‘아버지 박만도’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승화시켜 보고 싶습니다. 그럴 것이 예수 그리스도 역시 손과 발과 옆구리에 우리를 위한 ‘거룩한 상처’를 이미 간직하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남양군도의 한 섬’이 아닌,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입으신 그 상처는 박만도의 장애 정도가 아닙니다. 죽음 그 자체의 상처였습니다. 그 분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또 다른 시작이었습니다. 스스로 예언하신 말씀 그대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되레 그 분이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 되는 신분임을 증언하신 것입니다. 고난의 신비이자 영의 신비를 증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성학자 헨리 나우웬의 갈파처럼, 먼저「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의 모습으로 상처 입은 인생인 우리 죄인들을 등에 업고 오늘도 ‘외나무다리’를 건너가시는 분인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 얻은 상처가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는 원천으로 이용되는 방법을 사역자가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사역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헨리 나우웬은 나아가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사역자)그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처를 먼저 돌보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준비되는 것입니다. 그는 상처 입은 사역자이자 치유하는 사역자입니다. …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해방을 선포하는 사람은 자신의 상처뿐 아니라 남의 상처도 돌보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상처를 남을 치유하는 능력의 주된 원천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의미가 그런 것처럼, 상처나 고통을 앓아본 자가 남의 상처나 고통을 진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불쌍히 여길 수 있습니다. 진실로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이나 고난의 삶을 모르는 자가 고도한 신학 지식이나 성경 지식만을 설파하는 그것은 학문이 될 수는 있겠지만 결코 남을 구원할 수 있는 사역이 되지는 못합니다.
오늘도 상처 입은 인생들인 우리는 집을 향해 ‘눈두렁길’을 가면서, 우리를 앞세우고 뒤따라오는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이렇게 한이나 상처를 하소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
“와?”
“이래 가지고 나 우째 살까 싶습니더.”
“우째 살긴 뭐 우째 살아. 목숨만 붙어 있으면 다 사는 기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이어서 구약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도 너를 돌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불쌍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천하게 여겨져 네가 들에 버려졌느니라.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에스겔16:5-6)
실인즉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는 우리가 영원히 ‘부둥켜안을 수 있는 굵은 목줄기’가 되지는 못합니다. 늙으면 되레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고, 그러다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허무한 정체가 곧 육체이자 인생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의지의 대상도, 신앙의 대상도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선 친히 갈파하신 것처럼 영원한 구원이라는 상대적 차원의 시각에서 보면, 차라리 ‘육은 무익한’ 것입니다. 허무한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한복음6:63)
말을 바꾸자면, 인생의 진정한 구원은 믿음으로 거듭나는 ‘영(靈)의 문제’이지, 학문이나 고행이나 수행 등으로 이루어지는 ‘육(肉)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문제’이지 ‘땅의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 열림, 하늘나라에 대한 열림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육의 인생’의 가치나 의지나 수행 능력 등을 지나치게 무시 내지 백안시하고 있다고 항변할지도 모릅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저는 한국 불교의 명승이자 거목이자 자타가 평가할만한 대단한 수행자였던 ‘성철 스님’이 죽음을 앞두고 스스로 지으신 ‘임종계’ 곧 ‘열반송’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生平欺狂男女群)
하늘을 넘치는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친다.
(彌天罪業過須彌)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活陷阿鼻恨萬端)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一輪吐紅掛碧山)-
물론 저는 불교의 선(禪)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죽음을 앞에 둔 한 대단한 선각자의 저 신앙고백을 지나치게 비약이나 폄하나 왜곡을 시키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 ‘성철 스님의 열반송’이 인간으로 인간을 가르치거나 구원한다는 인생(肉)의 허무한 혹은 무능한 한계나 언어(말씀)의 한계를 토로한 것임에는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인간 ‘성철 스님’은 깨달음의 세계가 큰 분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럴 것이 저 고백을 역시 대단했던 사도 바울의 성경적 고백으로 바꾼다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로 그런 고백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현대를 살다 가신 '아름다운 빈 손'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도 스스로를 ‘죗덩어리(a mass of sins)’라고 고백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은 ‘죄인의 괴수’라는 큰 깨달음
그 자기 정체성 내지 인간의 정체성 거기서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비밀’이자 ‘영의 비밀인 그리스도’에 대한 열림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순교당하는, 참혹한 죽음을 미리 내다본 사도 바울은 그의 ‘열반송’ 아니 유서 같은
‘디모데전서’에서 이렇게 신앙고백 및 증언하고 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로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은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디모데전서1:15-16)
사도 바울 역시 ‘죄인 중의 괴수’, 그렇게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됨으로써 역시 하수(?)의 죄인들에게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가 될 수 있었고, 그렇게 ‘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의로운 수행자나 대단한 학자가 되기보다는 먼저 고난이나 고통의 영적 신비나 비밀을 아는 ‘상처 입은 수난자(受難者)’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비참한 그리고 허무한 인간 자기의 주제나 연약한 한계나 정체성을 절감하고, 크게 앓으며 ‘심히 통곡’해 본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새벽 수탉이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수제자 ‘베드로의 통곡’이 또한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우리 역시 거기서 머무르면 안 될 것입니다. 자신의 아픔이나 상처나 과거의 통곡을 거울삼아 되레 겸손한 신앙인격이 되어 섬기는 자세로, 동병상련의 자세로 나아가 이웃을 되레 살릴 수 있는, ‘상처 입은 치유자’들이 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주(예수 그리스도)는 영(靈)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린도후서3:17)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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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신을 구하고, 끝까지 자연(自然) 속에 머물러 있는 자는 자기를 만족시키는 빛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든가, 혹은 중보자 없이 그를 알고 신을 받드는 수단을 자기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든가, 그 어느 쪽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무신론 아니면 이신론(理神論)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이 두 가지 주장을 거의 똑같이 혐오한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에는 세계가 붕괴되는가, 아니면 지옥처럼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이 어둠에서 자기(自己)의 무가치함을 달리 무엇으로 결론지을 수 있을까?-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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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내 뜻대로 안 해주실 때, 견디기 쉽지 않다.
언제나 그랬고 장차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란 하나님이 내 인생을 나보다 더 잘 아시며,
주어진 삶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확신이다.
잊지 말라. 실망은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 생긴다.
기대를 조절하면 실망은 치유된다.
다음번 실망할 일이 생기거든 당황하지 말라. 포기하지 말라.
하나님이 여전히 주관하고 계심을 기억하고 참으라.
끝나기 전까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맥스 루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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