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형선 2013. 1. 7. 10:26

 

   러시아 ‘국민문학의 창시자’인 알렉산드르 푸슈킨은 38세로 요절했습니다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시대를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저도 청소년 시절에 벽에 붙여놓고 살았던, 우리에게 잘 알려진 푸슈킨의 시「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지금까지도 제 입에서 동요처럼 술술 흘러나오는 애송시가 되어 있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돌아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항상 슬픈 것.

    모든 것은 일순간에 지나간다.

    그리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슬픈 날도 불행한 날도 구름처럼 때론 흐르는 물처럼 ‘일순간에’ 지나갑니다. 즐거운 날도 행복한 날도 역시 ‘일순간에’ 지나갑니다. 현재는 머물지 않습니다. 머물면 더 이상 현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머물 수 없는 ‘행인과 나그네의 인생 여정’ 그 자체가 차라리 ‘슬픈 것'인지도 모르지요. 따라서 그것이 슬픈 일이든 즐거운 일이든 ‘일순간에 지나가는’ 그것에 집착해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하다보면 오히려 그것이 불행이고, 지나친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나 우울증에 빠지는 요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래서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나아가 지혜자 솔로몬은 저 ‘미래’를 보는 안목에 있어서,

   푸슈킨의 문학적인 차원의 그것을 넘어서서 영적인 지향을 보여줍니다.

   ‘영원(永遠)을 사모하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에 이룰 때가 있나니

           (…)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나니

           (…)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3:1-)

 

 

   따라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현재의 사건들에 영향을 받아 지나치게 일희일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도 안 될 것입니다. 질 때나 슬플 때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하고, 이길 때나 즐거울 때도 자만하거나 교만하지 아니하고, 그 모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곧 ‘영원한 생명(永生)’이라는 영원한 안목, 긴 안목에 열리면 사도 바울의 영적 통찰이 그런 것처럼, 때론 슬프고 때론 우환 혹은 환난을 당하고 때론 고통스러운 그 “모든 것이 합력해서 하나님의 선이 이루진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도 바울은 그래서 또한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善)을 이루느니라.-(로마서8:28)

 

 

   푸슈킨의 명작이자 중편역사소설인「대위의 딸」.

   우리는 거기서 ‘합력해서 선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섭리의 인상 깊은 사건을 다시금 상고해볼 수 있습니다.

   지체 높은 귀족의 아들인 표트르 안드레비치 그리노프는 편한 곳에서 누리며 장교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부친의 명령에 순종해서 변방의 부대에서 훈련을 받고자 집을 떠납니다. 몸종 한 명과 함께 포장마차에 몸을 싣고.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은, 인적도 없는 변방에서의 어느 날.

   혹독한 눈보라가 칩니다. 포장마차는 오도 가도 못하도록 눈더미 속에 파묻히고 맙니다.

   방향조차 분간할 수 없는 곤경에 갇힌 채 떨고 있는 그때, 한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나타납니다. 그 사내는 익숙한 솜씨로 마차를 몰아서 피신할 수 있는 외딴 자기 촌가로 인도합니다.

 

 

   이튿날 아침. 그리뇨프는 위기에서 살려준 그 촌부에게 감사하며, 토기털가죽으로 만든 자기 외투를 선물로 줍니다. 귀족 혹은 양반 신분의 장교가 자기 같은 천민에게 베푼 감사의 인사나 선물이 정중하고 성의 있는 것이다 싶었던 이유에서였을까요. 그 촌부가 이렇게 받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리. 이 은혜는 한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이윽고 목적지에 당도한 그리뇨프는 변방 부대의 사령관인 대위 쿠지미치의 딸인 마리아를 사랑하게 되고, 연적(戀敵)인 선임장교 쉬바브린의 훼방과 함정에 빠져 시련을 겪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변방의 일개 대위의 딸인 시골처녀 마리아와의 결혼을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마리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것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리뇨프의 곁을 떠납니다.

 

 

   1773년 10월. 러시아 황실의 지배에 저항하던 소수 민족의 봉기인 저 유명한 ‘푸가초프의 반란’이 일어납니다. 정부군이라지만, 하찮은 변방의 군대는 막강한 반란군의 세력 앞에서 속속 학살당합니다. 그리뇨프 역시 그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 포로가 되고, 마리아는 고아가 됩니다.

   그렇게 청년장교 그리뇨프도 마리아도 각각 학살당할 위경에 처하지만, 의외로 그 위기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지난날 그리뇨프가 감사의 선물로 외투를 주었던 그 거대한 체구의 사나이가 바로 반군의 수괴인 푸가초프였던 것입니다. 그가 또한 마리아까지 구출하여 탈출을 도와줍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그리뇨프와 마리아의 사랑은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며 해피엔딩으로 대미를 맺습니다.

 

 

   그러니까 청년장교 그리뇨프가 외딴 곳에 사는 미천한 촌부에게 주었던 ‘외투 한 벌’ 그 선행이 자기의 목숨과 자기가 사랑하는 마리아의 목숨까지 구원해 준 것입니다. 그리뇨프가 탄 마차가 벌판에서 눈보라치는 위기를 만난 것 자체도 당시로서는 큰 불행이지만, 그러나 오히려 그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과연 ‘인간만사 새옹지마(人間萬事 塞翁之馬)’입니다.

 

 

   우리는 오늘 누구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진정한 마음으로 ‘외투 한 벌’을 줄 수 있을까요? 새 옷도 아닙니다. 그냥 입고 있던 헌 외투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선행(善行) 내지 작은 사랑이 내일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악행의 해피엔딩은 없지만, 선행의 해피엔딩은 있는 법이니까요.

 

 

   한편, ‘눈보라치는’(?) 인생의 벌판에서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의 사랑 곧 ‘긍휼’을 입고 구원받은 ‘나병환자들’은 ‘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홉’은 감사할 줄 모른 채 그냥 자기 길을 가버립니다.

   그 비밀한 천우신조의 복된 인연 내지 기회를 스스로 버려버린 것입니다.

   마치 ‘단팥죽’만 얻어먹고 ‘장자권’은 버려버린 ‘육신의 아들 에서’처럼 말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누가복음17:17-)

 

 

   ‘그 중의 한 사람’만이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천대 받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릴 수 있는 ‘외투 한 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의 말이나 겸손한 자세만으로도 ‘천냥’ 아니 ‘일만 달란트’의 빚을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럴 것이 진정한 감사는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더 큰 감사와 더 큰 구원을 얻고, 금세와 내세로 통하는 영원(永遠)을 살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병만 구원받고 자기 길을 가버린 ‘아홉’의 그 육신은 다시 늙고 병들고 죽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사는’ 하나님의 영(靈)의 비밀에 열려져 신앙인격이 된 ‘그 중의 한 사람’은, 그래서 ‘네 믿음’으로 ‘금세에서 죽어도 내세에서 사는’ 영혼의 구원까지 받습니다. 당시 ‘천형(天刑)의 병’이라던 흉측한 나병조차도 합력해서 더 큰 선이, 영원한 선(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자세나 행태는 ‘그 중의 한 사람’일까요? ‘그 중의 아홉’일까요?

 

 

   되새김질 해봅시다. 오늘 내 뜻대로 안된 일이 내일 되레 잘된 일이 되고, 오늘 불행한 일이 내일 되레 다행한 일이나 행복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의 비밀을! 슬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그 모든 것이 합력해서 보다 나은 선, 보다 나은 결과, 보다 나은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십자가의 비밀'을!

   그것에 대한 확신은 영원(永遠)의 가치나 세계에 열리는 그 만큼에 비례해서 영원한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곧 ‘죽어도 사는’ 하나님의 나라 및 내세에까지 열릴 때 비로소 그 확신의 생명이 영원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모든 것’ 곧 범사에 감사하는 여유를 가지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예수 그리스도)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16:33)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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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일 매일 우리에게 찾아오는 놀라움이 슬픔으로 오든,

    기쁨으로 오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놀라움은 우리의 가슴에 새 자리를 열게 할 것입니다.

         

               (…)

 

    기쁨과 슬픔은 결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우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우리의 심장이 기뻐 용솟음칠 때,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는 친구를 아쉬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슬픔으로 가득 차있을 때,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쁨은 슬픔 속에 그리고 슬픔은 기쁨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온갖 노력을 기울여 슬픔을 피하려고만 한다면,

    결코 우리는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희열을 의심하면 고통 또한 우리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기쁨과 슬픔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도와주는 부모입니다.-

 

 

                                                               *헨리 나우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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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이렇게 말한 그리스도인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살면서 여러 번 실망하는 일을 겪었다.

    그 단어의 (*맨 앞) 한 글자를 바꾸어 ‘실망(disappointments)’이라고 읽는 대신

    ‘그의 약속(his appointments)’이라고 읽을 때까지는.

    그렇게 바꾼 것은 멋진 일이었다.

    ‘실망’은 마음을 상하게 하지만,

    ‘그의 약속’은 실망스러운 일을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찰스 스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