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성탄절 이브이군요.
이천년의 세월 속에
수많은 인생들이 왔다가 가고,
세대의 사상이나 이념이 변하고,
산하(山河)마저 변했다 쳐도,
그러나 하늘이 변한 것은 아닙니다.
말씀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왔다가 가는 것은
그리고 변하는 것은,
덧없는 세월이자 무상한 세대이지
그것이 과연 참 길은 아닙니다.
참 진리도 생명도 아닙니다.
그래서 ‘들을 귀’가 더욱 필요한 시대입니다.
하늘로부터 여전하게 들려오는
‘천사들의 찬송’ 소리가 들리십니까?
‘임마누엘’이라는 임재(臨在)의 말씀이 들리십니까?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는’
목자들에게 들리는 은총이자 구원입니다.
어두운 밤에도 깨어 있어,
소외된 들판에 있는 약한 양들을
자기 몸처럼 살피고 있는,
그런 목자들의 마음을 가진 ‘신실한 사람들’에게
보이고 들리는 하늘나라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그런 목자들의 마음으로 기다리는 ‘신실한 사람들’에게
보이고 들리는 하늘나라의 은혜가 되겠지요.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복음2:11-14)
세상의 모든 환난을 이기는,
인생의 모든 풍파나 애증을 이기는,
그런 하나님의 생명 곧 아기 예수의 생명과
그런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런 그리스도의 평화가
마구간 같은 우리 모두의 심령 깊은 곳에서
오늘 새롭게 태어나는
거룩한 탄생의 축일이 될 수 있기를!
서로 살리는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용서의 시작이자
사랑의 시작이 될 수 있기를!
메리 크리스마스!
* * *
성탄절은 ‘세상’이라는 ‘죄악의 한계’에 빠진, 빈부귀천을 망라한 우리 모든 인생들 곧 우리 모든 죄인들의 구원(救援)을 위한 축일이자 명절입니다. 그런데도 캐럴이나 대중가요형의 축가가 유별나게 울리고 화려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곳은 엉뚱하게도 상가(商街)나 호텔, 술집 등 유흥가 같은 ‘세상’의 거리입니다. 허영의 거리입니다.
‘아기 예수’가 누워있는 누추한 마구간의 구유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상업적이고 오락적이고 쾌락 내지 탐욕적인 ‘축일’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도 근년에 "오늘날 크리스마스는 상업적인 기념일이 됐으며, 화려한 조명이 하느님의 겸손함이라는 신비를 가리고 있다"고 개탄하셨던 것이겠지요.
하긴 상업적인 이익 혹은 세상적인 영광에는 늘 더 발 빠른 ‘이 세대의 아들들’의 지혜를 주님께서도 익히 알고 계십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누가복음16:8)
그래서 악화(惡貨)가 되레 양화(良貨)를 쫓아내기도하고, 짝퉁이 되레 정품을 몰아내기도하는 것이겠지요. 그렇다고 그런 불의나 악에게 지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으로 악을 이기신’ 분이니까요. 대속(代贖) 곧 희생의 삶을 통해 인생의 죄악도 저주도 고통도 죽음조차도 이기신 분이니까요.
그럼 그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의 시대에서 이런 ‘성탄절’ 같은 축일 내지 명절을 맞이하셨다면, 어디서 어떻게 지내셨을까? 그런 묵상을 해보다가 이내 떠오른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요한복음5:1-4)
당시 유대인의 명절은 일주일 동안 계속되는 유월절(무교절), 장막절 등이 있고, 8일 동안 계속되는 수전절(修殿節)이 있고, 단 하루만 지키는 오순절(칠칠절) 등이 있었습니다만, 이상의 성경 말씀에 기록된 저 ‘유대인의 명절’은 그 중 어느 명절을 의미하는지는 성경에 나타나있지 않습니다.
여하간 예나 지금이나 명절이자 축일을 맞이하면,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사람은 누구나 마음이 들뜨고 설레기 마련입니다. 혈육이나 친척이나 지인이나 연인들끼리 모여 보다 좋은 곳, 보다 멋진 곳, 보다 화려한 곳에 가서 포옴 잡고 기분을 내고 싶습니다. 즐기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인즉 복된 인생의 삶도, 복된 곳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이나 삶 자체는 말씀보다 더 강조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명절에 의외로(?) ‘누추한 마구간’ 아니 초췌한 병자들이 득실거리는 연못인 ‘베데스다’를 찾아가십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은혜)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웃사이더 곧 소외자들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고통 받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베데스다’ 그곳에서도 가장 소외된 ‘삼십 팔년 된 병자’를 찾아가십니다.
주님께서는 그 병자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참 어이없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병이 낫고 싶어서 38년 동안이나 ‘베데스다’ 못가에 누운 채 오직 하늘의 은혜 내지 자비만을 구하며 모질게 살아온 목숨 아닙니까.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렇게 뻔한 질문을?
그러나 사람이 병든 지가 오래 되면, 운명이나 팔자가 그러려니 하고 포기하기 십상입니다. 낙심 내지 절망하기 십상입니다. 병든 저 사람의 건강에 관한 문제만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인생에서 ‘38년’이라는 해묵은 악연이나 상처나 병든 정신이나 편견 등, 모든 병적 인생사의 문제가 또한 그렇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네가 아직도 희망을 가지고 있느냐’, ‘아직도 하나님의 자비가 네게 있을 것을 믿고 있느냐’, 그런 질문이 되겠지요.
그때, 그 병자는 38년 동안 가슴에 맺힌 자기의 한을 이렇게 토로 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I have no one to help me into the pool)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베데스다’ 그 연못마저도 먼저 들어가는 ‘일등’만이 치유함을 받는 무한경쟁사회였습니다. 서울 아니 예루살렘 도시 한복판에서 그렇게 소외당하고 무시당하고, 설움을 받는 것은 차라리 괜찮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비의 집이라는 구별된 교회 아니 ‘베데스다’에서마저도 소외당하는 설움, 그것은 치유되기 어려운 한이자 상처입니다. 이 대명천지의 세상에 ‘나를 도와주는 한 사람이 없다(I have no one to help me)'는 절대 고독, 절대 소외, 절대 절망.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병자를 ‘베데스다’라는 그 연못에 넣어주지 않습니다. 구차스럽게 그곳에 맡기지 않습니다. 율법이나 교리나 종교적 자비 이상인 ‘하나님의 형상’ 자체이신 곧 베데스다의 주인이자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일어나, 네 인생의 해묵은 한이나 상처나 쓴 뿌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불행했던 과거를 털고, 이기고, 미래를 향해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그 병자는 ‘베데스다’ 연못 그 장소에서 구원을 얻고자 했지만, 그처럼 대형교회든 소형교회든 그 장소 그 건물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옵니다.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일대 일로 직접 만나는 신앙의 체험, 구원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요한복음5:9)
따라서 오늘의 우리도 명절 내지 축일에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서가서 계신 곳으로 가야할 것입니다. 명동이나 강남으로 가면 ‘대형 산타할아버지’는 거기 계시겠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 계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베데스다’에 앞서가서 계십니다. 아기 예수 역시 낮은 그곳 ‘마구간’에 계십니다.
우리는 ‘베데스다’에서 해묵은 소외와 절망과 한을 앓고 있는 그 누구를 도와서 ‘그리스도’라는 구원과 치유의 못에 넣어줄 수 있는 ‘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그 ‘한 사람’이 바로 하늘의 진실한 구원과 사랑과 행복을 나누는 ‘작은 예수’가 되겠지요.
우리와는 달리,
죄성(罪性)이 없기에
오히려 겸손하신 주님.
우리와는 달리,
죄악(罪惡)이 없기에
오히려 온유하신 주님.
그래서 지극히 낮은 곳에
이미 와 계신 주님.
주님이 계신 그곳을 알 수 있는
영(靈)의 눈과 귀와 깨끗한 마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셔서,
‘예수 없는 성탄’이 되지 않게 하소서.
‘예수 없는 교회’가 되지 않게 하소서.
‘예수 없는 심령’이 되지 않게 하소서. (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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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한복음1:14)라고 말씀하신 이 오묘한 말씀을 적절하게 해석하여서 우리로 하여금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전능하신 성부(聖父)의 독생자(獨生子)를 믿게 할 수 있겠는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뜻은 신성(神性)이 육체로 변화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신성이 육체를 취하였다는 것이다. … 그의 인성(人性)은 남녀 간의 성적 정욕의 결과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담의 죄 가운데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중생(重生)으로 씻어야할 죄책이 없었다. 그는 동정녀에게서 나셨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그의 육체를 잉태했을 때에 육체적인 정욕과는 상관이 없었다.
그의 인성은 우리의 삶의 모형이 되기 위해서 곧 인간이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분명한 길을 보여주기 위해서 취하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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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신 것은 하나님이 보통 출산 방법을 천하게 보셨기 때문은 아니다. 인류 이상의 생명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데 필요했기 때문이다. 속죄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강림하신 유일한 목적은 아니었다. 이것은 죄악 세상에 나타나신 둘째 아담에게 저절로 부과된 직분이었다.
동정녀 탄생은 새 사람을 세상에 보내는데 필요했다. 나는 성경의 기사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진화의 순서로 볼 때, 또는 우리 인류의 절실한 요구에 비춰 볼 때, 이 큰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 *
아아, 나는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이 강림하신 이 기쁜 명절을 축하할까? 노래를 가지고 할까? 보배를 가지고 할까? 아니다, 아니다. 새로운 결심을 가지고 하리라. 그의 마음(心情)을 가지고 세상의 어려운 일에 임할 각오를 새롭게 하리라. 그를 대신하여 이 세상의 죄와 싸울 결심을 가지고 하리라.
나사렛 예수님, 금년 이날 다시 내 마음에 오셔서 나의 이 결심을 견고하게 해주시옵소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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