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꼭 '깨달아야 할 한 법'

이형선 2012. 5. 24. 18:33

 

  전래적인 민속 내지 토속신앙 같은 하등종교나 동서양의 성인(聖人)들에 의한 고등종교에 이르기까지, 그런 종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대개 이런 다원주의적 이해를 가지게 됩니다. 종교는 산의 정상을 향해 가는 길이 동서남북으로 서로 다를 뿐, 인간을 바르고 선하게 살도록 가르치는 고등종교는 다 같은 것이다. 다 좋은 것이다. 고등종교라면 정상에서 다 하나로 만나게 되는 것이니까. 그런 이해 말입니다. 실인즉 저도 문학청년이던 젊은 시절엔 그 정도로 이해를 했었습니다.

 

 

  따라서 꼭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편협한 독선이나 아전인수적인 교리일 수 있다는 생각이나 의문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거창하게 비교종교론을 운위하며 다른 종교를 폄하하고 싶지도 않고, 기독교의 교리를 강조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제가 지난날 피를 흘리도록 깨지면서 체험하고 상고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그 대속(代贖)의 의미와 가치를 성경을 통해 풀어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어렵잖게 새로 개점한 영업점이나 특정 행사를 통해 이른바 ‘고사(告祀)를 지내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삶은 돼지머리의 입에 돈을 물려놓는 그런 ‘고사’의 사전적 해설은 이렇습니다. ‘액운을 쫓고 행운을 맞게 해달라고 음식을 차려 놓고 신령에게 제사를 지냄, 또는 그 제사.’

  유교도 불교도 ‘신령’이라는 그 숭배의 대상에는 차이가 있지만 역시 그런 제사를 지금도 지냅니다. 그럼 동서양의 고등종교나 하등종교를 막론하고 모든 종교에 한결같이 나타나는 그 제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희생물(犧牲物)’입니다. 신에게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죄악이나 허물을 대신해서 죽음으로서, 대신해서 속죄하는 곧 ‘대속(代贖)’의 희생물이라는 것입니다. 죄악이나 허물이 있는 모습으로는 이른바 ‘부정 타서’ 신께 가까이 갈 수 없으니까 먼저 동식물 등의 제물을 희생물로 드리는 속죄를 통해 종교의식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도 양이나 소, 가난한 사람인 경우에는 비둘기나 식물성 소제 등으로 드리는 그런 제사 의식이 곳곳에 빈번하게 나타납니다.

  “너희는 나(*하나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출애굽기20:23-)

 

  나아가 성경은 저 양이나 소 곧 희생제물에 의한 대속의 사상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법적 내지 율법적으로 ‘죄인’이기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버린 인간이 감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은혜의 길’이 구약시대부터 이렇게 허락된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위기17:11)

 

 

  중요한 것은, 선지자들을 통한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인 성경에 대한 영적 그리고 통전적인 이해가 열리면, 구약시대의 양이나 소나 염소나 비둘기 등의 저 모든 희생제물은 장차 희생제물로 세상에 친히 오실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신 구원자 예수님을 시종여일하게 예표 및 상징하고 있다는 바로 그 계시성입니다. 마침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세상에 오신 자신의 사명을 친히 이렇게 증언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20:28)

 

  세상에 온 우리 인간 역시 누구에게나 나름대로 자기 몫의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몫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성공해서 남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 남보다 섬김을 받으며, 남보다 더 잘 먹고 잘 누리며 잘사는 것?

  사도이자 선지자인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에베소서5“1-)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 저 모든 예언과 예표와 상징에 대한 말씀의 분명한 성취임이 이렇게 증언되어 있기도 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예수께서)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9:12)

 

 

  그렇게 죄인인 우리 인간이 신(神) 곧 창조주 곧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영원한 구원의 길이, 영원한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를 통해 성취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젠 더 이상 동양도 서양도 소나 양의 제물을 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돼지머리 놓고 고사 지낼 필요도 없습니다.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또한 그런 의미입니다.

 

 

  그럼 여기서 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냐, 그 문제를 좀 상고해봅시다.

  그럴 것이 인도의 힌두교나 불교의 수행자들처럼 스스로 치열한 고행이나 수행 정진을 통해 ‘깨달음’이라는 절대자를 만나고 절대의 세계에 열리고자 하는 그런 금욕적인 노력이 보다 이성적이고 구도적인 자세일 것 같다 싶기도 하니까요. 자기가 치열하게 수행하며 자력(自力)으로 자기를 구원하면 되지, 예수를 믿는 타력(他力)에 의지해서 구원 운운하는 것은 차라리 비겁한 자세가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고민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저도 치열하게 수행하는 여러 종교들의 수행자들의 그 구도적인 열심과 노력 자체는 진실로 존경합니다. 저도 젊을 때는 사흘 혹은 열흘 정도의 금식기도 생활은 간혹 해봤습니다만, 금욕 당시 때는 제가 거룩한 성인(聖人) 혹은 신(神)이라도 된 듯 경건해지더군요. 그러나 돌아서서 ‘배가 부르면’ 옛 성정은 액면 그대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깊이 상고해볼수록 부족한 저만 그런 것은 아니었더군요.

 

 

  사도 바울은 유대교 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종파인 바리새파 출신으로 스스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할 만큼 대단한 종교인이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의로운 자기 행위를 통해서, 자력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진 유대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고 운운하는 차라리 경박한(?), 차라리 비겁한(?) 타력 종교인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의 무리’로 규정하고 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기 위해서 ‘살기가 등등하여’ 일선의 선봉에 섰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입니다. 그렇게 이단의 무리들을 체포하거나 잡아 죽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는 극적으로 하늘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성령 체험이자 신비 체험을 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9:4-) 그는 그 후 완전히 뒤집어집니다. 차라리 교만했던 사울에서 스스로 ‘작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는 ‘바울’이 된 것입니다. 그만큼 신비한 영적 세계,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에 제대로 열려졌다는 반증이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진실로 ‘하나님의 나라’에 열리면 이기적인 ‘세상의 나라’나 자기에 대한 관심은 ‘작은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그는 그렇게 이후 그리스도에게 온전하게 사로잡힌 일꾼(종)이자 사도가 됩니다.

 

 

  나아가 차라리 수행자처럼 의인처럼 치열하게 율법적으로 살아왔던 사도 바울이 영적인 비밀의 세계에 열린 후, 심오한 자기 성찰을 통한 인간 자기의 정체성과 한계에 대한 고백은, 신학자 칼 바르트의 유명한 평가처럼 진실로 ‘거룩한 비탄(Holy Sadness)' 그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9-)

 

  정녕 그렇습니다. 자기의 의로운 행위나 선행이나 수행으로 스스로 구원 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 태생적으로 이미 타락한 인간의 죄성 그 한계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저 ‘한 법’을 온전하게 깨닫지 못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저 ‘곤고한’사람 곧 ‘탈라이포로스’는 ‘비참한, 불쌍한’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 자기의 비참함을 진실로 깨닫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이나 신앙은 수행이나 신학을 포함한 모든 지식이나 사회적 신분으로 되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

 

  주님께서 스스로 유식하고, 거룩하게 잘 믿는다는 그래서 사회지도자로 행세하고 있던 영적으로 교만한 바리새인들은 “독사의 새끼들”이라는 거친 표현까지 불사하며 준엄하게 꾸짖으며 내치시고, 세리나 창녀 같은 멸시받는 죄인들이나 나환자 등을 위시한 병자나 소외자들은 영접하시며 구원하신 것은 그들이 비참한 인간의 정체성 저 ‘한 법’을 그들의 육신적인 불운이나 비참함을 통해 되레 크게 깨닫고 그래서 심령이 가난해진 곧 영적으로 겸허해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아울러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영적 교만은 육신적 타락이나 비참함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파스칼의 이런 명언을 유념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자기)의 비참함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면 절망에 빠진다. 하나님만을 알고 인간(*자기)의 비참함을 모르면 교만에 빠진다.”

 

 

  그렇습니다. 인간 자기의 실존적 죄성에 대한 저 ‘한 법을 깨달으면’ 나라는 인간은 죽어야 마땅한 ‘비참한’ 죄인입니다. 내가 선행한다고, 수행한다고 해서 온전하게 거룩해질 수 있는 분수는 아니라는 것. ‘사망의 몸’인 것을 참으로 알았으면 당연히 죽어야지요. 그렇다고 자살해서는 안 될 일. 그때 고개를 들어 내 죽음 내 해골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는 저 ‘골고다(해골)’ 언덕을 우러러보면, 거기 나를 대신해서 이미 십자가에서 죽어있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대속(代贖)의 발견입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운명이 거듭나는 일생일대의 발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아버지 하나님의 본래적인 자녀의 형상으로의 회복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자기의 비참함과 하나님을 함께 알았던 사도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대속의 절대 가치를 찬미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로마서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