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기회와 '선한 사마리아인'

이형선 2012. 5. 28. 09:13

   동양의 지혜인 공자께서 자기를 완성하는 덕성이자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성품으로 ‘인(仁)’을 강조하신 것을 우리는 익히 압니다. 스스로 그렇게 살고자 끊임없이 노력도 하신 분입니다. 그럼 그 ‘어질, 인자할 인(仁)’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요? 제자 중 한 사람인 번지(樊遲) 역시 저 ‘인’이라는 화두로 적잖이 고심을 했던가 봅니다. 그럴 것이 「논어」에서 “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세 차례나 스승에게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공자의 표현이나 답변은 다릅니다.

   첫 번째 답변은 이렇습니다.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답변은 이렇습니다.

   “수고에 비해 얻는 것이 적다할지라도 감히 실천하는 것이 인이다.”

   세 번째 답변은 이렇습니다.

   "자기의 일상생활이나 맡은 바 일에 신중하고, 남에게 성의를 다하는 그것이 인이다.”

   모두 충분하게 음미해볼만한 좋은 말씀들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고심하는 제자의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변이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실천하는 확실한 삶의 모범이 없기에 답변이 이상적 내지 추상적인 이론이나 지적 논리에 그치고만 것 같은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과의 대화에서도 때로는 ‘인에 가깝다(仁近)’ 혹은 ‘인에 멀다(鮮仁)’라는 어법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저는 ‘인도의 성자’ 간디의 이런 일화가 떠오릅니다.

   어느 날, 한 부인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간디에게 ‘아들이 사탕을 너무 좋아하니까 선생님께서 사탕을 먹지 말라고 타일러 달라’는 내용의 부탁을 합니다. 그때 간디는 며칠 후에 다시 오라며 미룹니다. 그 부인이 아들을 데리고 며칠 후에 다시 가자 며칠 후에 오라며 또 미룹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갔을 때, 비로소 그때에야 간디 선생이 어린 아이에게 이빨이 썩으니까 사탕을 먹지 말라고 타일러 줍니다. 그때 그 부인이 의아해서 묻습니다. 전에 왔을 때는 아이에게 그런 말씀을 해주시지 않고 왜 미루셨느냐고. 그때 간디의 답변이 이렇습니다.

   “그땐 나도 사탕을 먹고 있었거든요.”

 

   그렇습니다. 말로 남을 가르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삶으로 남을 가르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곧 신앙인으로 오늘을 사는 저나 우리의 고민이자 숙제이기도 합니다. 여하간 저 ‘인(仁)’이란 글자를 풀어봅시다. ‘하늘과 땅’ 아울러 ‘나와 너’라는 ‘두 세계(二)’에 열린 ‘사람(亻)’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그 두 세계에 열린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린도전서10:33-)

 

   사계의 어느 분야이건, 남다른 노력과 능력이 있었기에 ‘지도자’도 되는 것이겠지만, 존경받는 진정한 지도자가 되려면 과연 삶으로 모범을 보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담대하게 소신이나 인격도 증언할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자기에게도 아울러 많은 사람에게도 그 결말이 좋습니다. 특히 영적 지도자의 모범은 생명 그 자체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과 성경에 유식한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 그리스도께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누가복음10:29)

   그때,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강도 만나 거의 죽은 자’를 모른척하고 지나쳐버린 성직자인 ‘한 제사장’도, ‘한 레위인’도 다 ‘이웃’은 아니라고 정의하십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저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나름대로 오직 하나님을 거룩하게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서둘러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일 수도 있었겠지요. 그래서 피를 묻혀 부정 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무관심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어서 성전에 올라가서 많은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한 사람을 외면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성경은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한일서4:20)

 

   따라서 정작 큰 문제는, 하나님도 이웃도 제대로 모르는 저런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성전이나 군중 앞에 가서 무엇을 가르치며 말씀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사랑과 헌신의 삶을 감히 선포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그것입니다. 추상적인 ‘오직 하나님 사랑’ 운운하며, 되레 많은 사람들의 심령을 오도하며 죽여 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럴 것이 저들의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나 외면은 기독교윤리적 측면에서 보자면 살인이나 강도의 행악과 같은 차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그네 인생’의 여정에서, 사랑 곧 긍휼이나 자비를 베풀 기회나, 봉사나 헌신할 수 있는 수 있는 기회도 이른바 ‘성공의 기회’ 그것처럼 역시 아무 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저들은 자비를 베풀 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그래서 영원한 축복의 기회를 놓쳐버린 되레 불행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저 강도 만나 버려진 자를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어’ 돌봐준, 당시 혼혈족이라고 멸시받던 미천한 ‘사마리아인’을 되레 ‘이웃’이라고 축복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질문했던 그 율법교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율법 곧 성경 지식이 아닌, 사랑의 삶을 통해 모범을 보이라는 것. 허무한 인생에서 진실로 영원히 남는 것은 과연 지식도 아니고, 재물도 아니고, 육체도 아닙니다. 성공한 세상의 신분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남는 것은 어려운 이웃이나 작은 이웃을 살리려고 노력했던 사랑입니다. 선한 일에 부요한 삶입니다.

 

   주님의 ‘새 계명’을 다시 들어봅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13:34-)

   그리스도의 제자였던, 인도의 고통받는 ‘빈민의 어머니’였던 마더 데레사 수녀의 말씀도 함께 들어봅시다.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한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 2천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