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생명의 근원, 평화의 근원

이형선 2012. 5. 21. 16:59

 

  우리 사회가 서구화될수록 정치적 혹은 경제적인 이익 집단들의 관계는 조직화되고 강화되지만, 진정한 인간의 관계는 급속하게 해체되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이혼이나 가족의 해체로 핵가족화 되어가는 삭막한 사회현상에서 그것을 실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타(自他)를 막론하고, 나름대로 배울 만큼은 배우고 덕성이나 포용력도 있고, 선한 마음으로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조차도 때론 의외로 하찮은(?) 말이나 사건에 의해 시험에 들고, 감정에 사로잡혀버리는 사례를 우리는 스스로 자주 체험하기도 하고 또한 목격하기도 합니다. 가까운 부부나 가족이나 이웃 사이일수록 오히려 사소한 일에서 은근하게 빚어지는 불화나 갈등이나 반목은 되레 더 많습니다.

가까운 사이인 만큼 기대도 크고 그래서 실망도 크기 마련이기 때문이겠지요. 멀리 있는 남남이라면 부딪칠 일도 없으니까 피차 예의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가까운 사이일수록 부딪칠 일도 많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마음이 스트레스 같은 감정의 기복에 자주 사로잡히는 것은 차라리 당연지사이겠지요.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4:23)

  그렇습니다. 생명의 근원도, 평화의 근원도 다 마음에서 나옵니다. 문제는 ‘내 마음’이 내 뜻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내 마음이 내 뜻대로 지켜지면 분노하거나 싸울 사람이 누가 있고, 이혼 등으로 아예 헤어져버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저 잠언의 말씀을 남긴 ‘전무후무한 지혜자’ 솔로몬조차도 군왕으로 성공한 이후에는 그의 마음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여인들과 어울려 방탕하다가 비극적인 남북 분단과 혼합주의적 신앙의 빌미와 단초를 후손에게 남겼습니다.

  또한 신실한 시편의 기자 역시 연거푸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편42:11)

 

  낙심이나 불안 역시 미움이나 증오나 분노 같은 감정의 기복입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내 마음대로 역시 절제되지도 정화되지도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우리 범인들의 푸념처럼 한 마디로 “내 마음 나도 몰라”, 바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우리 인간의 마음의 정체와 한계를 이렇게 갈파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로마서7:19-)

  육체를 따라 난 내 속에 타락한 본성에 의한 죄(sin)가 있고, 사단(satan) 곧 악령의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악령의 세력은 “내 마음 나도 몰라”처럼, 내가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세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 같은 무력한은 물론이고, 지혜자 솔로몬보다 더 강하고, 대사도 바울보다 더 강한 세력이라는 것. 따라서 인간 스스로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거듭나고,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마가복음8:34) 때, 비로소 세상과 육체를 지배하는 악령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자기 부인’은 고통스런 구속(拘束)이 아닙니다. 보다 큰 자유, 진정한 자유를 위한 소아(小我)의 부정일뿐입니다. 하나님의 큰 생명, 큰 평화, 큰 사랑을 위한 자기 한계의 부정일뿐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는 자는 더 이상 자기 세계가 영적으로 크지를 못합니다. 자기 부인 그것이 또한 기도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26:39)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기도의 모범이자 ‘자기 부인’의 모범이 그런 것처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감정도 없습니다. 아직 ‘내가’ 꿈틀거리고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죽은 것도 온전히 맡긴 것도 아니고, 온전한 순종도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섭리에 전적으로 맡긴 채 오래 참을 때, 저 시편기자의 후반의 말씀이 또한 마침내 성취될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사랑함으로써 남을 행복하게 하라. 그러면 당신의 인생도 바뀌게 된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서 행복과 사랑이 당신의 것으로 발견되어지기 때문이다. 마음의 평화에 가까이 가는 첫걸음은 (*그리스도처럼)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는 것이다.〈버너드 시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