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사람 그 누구도 불행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그 행복과 불행이란 것을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평수가 넓은 고급아파트에서 호의호식하며 사는 삶은 행복이고,
그런 수준 이하에서 사는 삶은 불행일까요?
건강한 나폴레옹은 행복하고, 삼중고 장애의 몸인 헬렌켈러는 불행한 것일까요?
육신의 쾌락을 많이 즐긴 카사노바는 행복하고, 수녀였던 마녀 데레사는 불행한 것일까요?
물론 그런 기준에서 행복과 불행이 비롯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도 세속의 가치관에 알게 모르게 중독되어 있고, 그렇게 길들여져 있는 우리는
프랑스 사상가 알랭의 언급처럼 '기성품의 행복'만을 찾아다니는데 급급하고 있습니다.
유행 따라 사는 인생처럼, 때론 부나방처럼 그렇게.
사도 바울은 참수형을 당할 수도 있는 어둡고 깊은 빌립보 감옥 안에 억울하게 갇혀 있으면서도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사도행전16:25)합니다. 그는 육체에 고통스러운 질병인 '가시 곧 사단의 사자'가 있었습니다. 그 '가시'가 안질이든, 간질병이든, 선교 현장에서 당한 모진 핍박과 고초로 인한 신경통이든 간에 그는 그 '가시'를 통해 되레 비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린도후서12:9)
그렇듯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빌립보서4:12)는, 그의 '자족(自足)'의 비결 곧 행복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한 마디로,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 안에 있는 것도, 재벌 안에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대단한 사상이나 이념 안에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 있을 때도, 병고 안에 있을 때도 결코 그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항상 세상을 능히 이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우시는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저 모든 곤경이나 사망의 골짜기에서 평안할 수 있었고, 넉넉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 곧 처참하게 순교당할 때조차도 '주 안에' 있었습니다.
그것조차 감사하면서. 그것조차 기뻐하면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립보서4:4)
'영성 편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기회와 '선한 사마리아인' (0) | 2012.05.28 |
---|---|
고향으로 가는, 시골길 (0) | 2012.05.25 |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꼭 '깨달아야 할 한 법' (0) | 2012.05.24 |
생명의 근원, 평화의 근원 (0) | 2012.05.21 |
'지화자 좋을시고'의 사회 (0) | 2012.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