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용서'

이형선 2015. 12. 28. 11:32

 

 

프랑스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고전이〈레미제라블〉이라고 하더군요.

우리가 잘 아는 바처럼, 위대한 문호

빅토리 위고(Victor-Marie Hugo)가 쓴

5부작 소설〈레미제라블(*곤고한 사람들)〉은

프랑스 대혁명 직전의 사회상을 그린

불후의 명작이자 걸작입니다.

 

루이 14세가 확립한 절대군주제의 왕권과 성직자와 귀족들 중심의 소수 특권층이자 기득권층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가난과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절대 다수인 서민들이자 하층민들이자 ‘곤고한 사람들’이 특권층에 저항해서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평등한 사회건설을 위한 혁명을 갈구하는 시대. 물론 하층서민인 주인공 ‘장발장’은 직접 시민혁명 운동에 가담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당시 파리에서는 거의 매일 가난한 서민들의 ‘빵 문제’로 인한 사건이나 파동이 끊임없이 발생되었다고 합니다.

작가는 장발장을 통해 인간의 자유의 소중함과 새롭게 거듭난 인간의 헌신적 사랑의 힘을 통해 혁명이 이루어지는, 그런 인격적 혁명의 나라 내지 ‘하나님의 나라’를 더 희구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럴 것이 ‘장발장’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적 혁명’보다는 “내가 죽은 것”이라는 인격적으로 ‘거듭난 사건’의 결정적 체험이 작가에게도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무 살의 나이에 소설가가 된 빅토르 위고는 유능한 작가였지만 그러나 그런 작가로서의 명성과는 달리 사생활은 엉망이었다고 합니다. 세속적 욕망과 술과 향락에 빠져 망나니(?)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하니까요. 술에 취하면 가족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예사로 일삼았기에, 그의 존재가 가족들에겐 두려움과 기피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외동딸이 가출을 합니다. 당연히 수소문하지만 행방이 묘연합니다. 며칠 후, 딸의 익사체가 세느강에서 발견됩니다. 자살한 것입니다. 딸의 방에서 발견된 유서는 이랬습니다.

-아버지, 이제 돌아오세요. 하나님과 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제가 떠납니다.-

그런 딸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하던 빅토리 위고는 이렇게 토로합니다.

“이 비극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심판이다. 나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은 것이다.”

그렇게 ‘거듭난 사건’을 통해 결정적으로 회개(悔改)한 그는 이후 인격적으로 변화된 삶을 살면서 무려 17년에 걸쳐 저 방대한 저서〈레미제라블〉을 집필하게 됩니다. 따라서 저 걸작이자 명작은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은 것”이라는 그의 고백에 대한 확실한 증명이자 딸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회개에 합당한 열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작품속의 주인공 장발장의 사회적 범죄는 겨울에 시작됩니다. 누나의 남편이 죽자 일곱 명이나 되는 조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그러나 겨울철에는 궂은 일거리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난에 시달리다가 굶주리는 조카들을 위해 빵을 훔쳤던 장발장. 그래서 체포된 그는 조사과정에서 비정한 형법에 의해 이런 저런 죄목이 추가되어 징역 5년의 선고를 받고 수감됩니다.

그러나 굶어죽을 형편에 처한 어린 조카들의 얼굴이 계속해서 떠오른 장발장은 번번이 탈옥을 시도하지만 죄다 실패하고 가중 처벌되어 결국 19년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런 장발장은 13년 동안의 수형생활을 하다가 중년의 나이에 감옥에서 나오지만, 그러나 계속 자유를 제한 받고 감시 받아야만 하는 ‘가석방’된 죄인 신분입니다. 사회에서도 그는 전과자라는 이유 때문에 냉대만을 받습니다. 오갈 곳 없는 신세가 된 그의 가슴엔 그럴수록 ‘곤고한 사람들’ 내지 ‘가난한 사람들’을 한사코 외면하는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세상에 대한 비관과 불만과 증오심만 쌓여갑니다.

 

그런 장발장은 한 부인의 권유에 따라 성당으로 찾아가 ‘늙은 사제’ 미리엘 신부에게서 음식을 얻어먹습니다. 그러나 장발장은 당시 누리고 사는 소수 특권층이자 기득권층에 속하는 ‘성직자 신분’이었던 그 미리엘 신부 집의 벽장 속에 있던 은식기를 훔쳐 배낭 속에 넣고 몰래 도망쳐버립니다.

이튿날 아침 시중드는 여인이 괘씸하다는 듯 이렇게 외칩니다.

“주교님! 그 남자가 도망쳤어요. 은그릇을 훔쳐 가지구요.”

한동안 잠자코 있던 노년의 신부이자 주교는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유 있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른 바 ‘많이 가진 자들’이나 ‘기득권자들’이 경청해야할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은그릇이 우리 물건이었던가?

 그건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오.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임에 틀림없는 것 같지 않았소?”

 

우리가 억울하게 손해 내지 피해를 입은 혹은 잃어버린 혹은 강탈당한 ‘은그릇’이라는 소유, “그건 하나님의 것이오”라는 가치관. 성경 말씀으로 직접 풀어보자면 “주신 자도 (하나님)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하나님)여호와이시다”(욥기1:21)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인 그것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이웃이 가져갔으니 탓할 일이 아니다”라는 공존의 가치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선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마태복음5:40)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런 ‘그리스도의 마음’이자 큰마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인즉 노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저 말씀을 ‘바보처럼(?)’ 그대로 실천합니다. ‘속옷’을 훔쳐간 장발장을 용서하며 되레 ‘겉옷’까지도, 아니 ‘은그릇’을 훔쳐간 장발장을 용서하며 ‘은촛대’까지도 가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누가 문을 두드렸다.

세 사람이 한 사람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다. 세 사람은 헌병이었고 한 사람은 장발장이었다. 헌병반장이 안으로 들어와 군대와 군대식 경례를 하고 ‘각하’하고 주교에게 말했다. 주교는 노령의 몸으로서 있는 힘을 다해 재빨리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니 당신이구려. 다시 만나게 되어 다행이오. 어떻게 된 거요?

 나는 당신에게 은촛대도 드렸는데 어째서 그것과 함께 가져가지 않으셨소?”

장발장은 눈을 크게 뜨고 주교를 쳐다보았다. 그 표정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정죄하는 헌병들 앞에서 되레 선수를 친 신부의 ‘거룩한 용서’에 의해 헌병들의 손에서 풀려난 장발장. 신부는 그에게 ‘두 개의 은촛대’를 더 가져다줍니다. 장발장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저 기계적으로’ 그것을 받아듭니다. 그런 장발장에게 주교는 나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당부합니다.

 

-“잊지 마시오. 절대로 잊지 마시오.

   이 은그릇을 정직한 사람이 되는데 쓰겠노라고 내게 약속해 준 일을 말이요.”

꿈에도 약속한 기억이 없는 장발장은 어리둥절해 있었다. 주교가 엄숙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장발장. 나의 형제여. 당신은 이제 선에 속한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의 영혼을 어두운 생각이나 영원한 형벌의 처소에서 끌어내어 하나님께 바쳤소이다.”-

 

주교의 집에서 나온 이후 사제의 저 말씀이 살아서 장발장의 심령에서 끊임없이 맴돌곤 합니다. 사제의 저 ‘용서’에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노 사제의 ‘용서’ 자체가 장발장의 영혼 내지 양심을 자극하는 “가장 강력한 공격이고 가장 무서운 타격”이 되어 그를 새로운 시작이자 새로운 인간의 삶으로 인도합니다. 그를 거듭난 인간으로 변화시킨 결정적 힘이자 ‘공격’이자 ‘타격’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강력한 공격이고 가장 무서운 타격”은 원망이나 증오나 폭언이나 폭력 같은 ’어둠의 힘‘이 아닙니다. 총칼이나 핵무기도 아니고, 율법이나 형법도 아닙니다. 그런 ’공격‘이나 ’타격‘은 보복의 악순환만 불러옵니다. “가장 강력한 공격이자 가장 무서운 타격”은 되레 ‘용서’입니다. 거룩한 용서와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일제 강점기의 아동문학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소파 방정환 선생은 저 장발장과 노 사제와의 사건

같은 일을 실제로 겪은 적이 있다고 전해오는데,

그 내용의 대략인즉 이렇습니다.

어느 날, 방정환 선생이 밤늦도록 책을 읽고 있는데 복면을 쓴 강도가 불쑥 들어오더니 시퍼런 칼을 들이밀며 돈을 요구합니다. 방 선생은 조용히 일어나 책상서랍 속에 있던, 당시에 거금이었던 돈 390원을 죄다 꺼내어줍니다. 돈을 챙긴 강도가 그대로 도망치려고 하자 이번에는 방 선생이 말을 던집니다.

“여보시오. 돈을 줬으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고 가야될 것 아니오?”

깜짝 놀란 강도가 욕설로 답합니다.

“그래 고맙다. 이 ☓☓야!”

 

그렇게 강도가 떠난 얼마 후.

날이 밝았는데 누가 대문을 두드립니다. 방 선생이 나가보니 예의 강도와 순경이 거기 있습니다.

“선생님, 간밤에 많이 놀라셨지요?

 이 자가 선생님 댁에서 강도질을 했다고 하기에 확인을 하러 왔습니다. 맞지요?”

그때 방 선생은 의외로 순경에게 이렇게 답변합니다.

“아, 이 사람? 어젯밤에 우리 집에 왔었죠.

 돈이 필요하다고 하기에 사정이 딱해 보여서 내가 390원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고 갔는데요.”

의아한 순경이 다시 묻습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선생님 댁에서 돈을 훔쳤다고 자백했는데요?”

그래도 방 선생은 여전히 태연자약합니다.

“그렇게 정신이 오락가락하면 어떻게 살겠느냐?”고 되레 강도를 염려하며 혀를 찹니다. 그러자 순경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강도를 그냥 풀어주고 맙니다.

 

순경이 돌아가자 강도는 방 선생 앞에 와락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눈물을 터트리고 맙니다. 방 선생의 ‘거룩한 용서’ 자체가 “가장 강력한 공격이자 가장 무서운 타격”이 되고 ‘신비한 힘(感化力)’이 되어, 비뚤어진 한 인간을 새로운 시작이자 새로운 인간의 삶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선생님, 용서해주십시오. 선생님 같은 분은 난생 처음입니다.”

방 선생은 강도의 등을 두드리면서 되레 이렇게 위로합니다.

“일어나시오. 사람이 어렵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오.

 다시는 그런 일 하지 마시오.”

그 후, 그 강도는 자청해서 방 선생 곁에서 방 선생의 집안일을 돕는 사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연말연시를 맞이하는 이 겨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및 ‘작은 예수들’의 저런 이타적(利他的)인 용서와 사랑의 삶을 본받아 ‘작은 이웃’이나 ‘더러운 죄인’이나  ‘흉악한 죄인’ 누구를 새로운 시작이자 새로운 인간의 삶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요? ‘하늘의 복’이 있는 구원과 변화된 삶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 와서 누군가를 저 노 사제처럼 저 소파 방정환 선생처럼 진실하게 용서해 본 적도 없고 진실하게 사랑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라면, 실상인즉 일개 동물의 삶과 다를 바 없는 무가치하고 허무한 삶을 살다가는 인생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럴 것이 ‘동물의 세계’에는 분명히 ‘용서’가 없으니까요.

또한 분명한 것은 우리의 심령까지도 훤히 꿰뚫어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듯이 진실한 용서함이 없으면 진실한 용서 받음도 없고, 그래서 새로운 시작이자 새로운 인간의 삶도 미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답변하시는 말씀을 들어봅시다.

‘용서’의 ‘신비한 힘’, 그 출처의 근원에 대한 증언이기도 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하나님)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태복음6: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