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의 저자이자 4차 산업혁명의
주창자이기도 한 클라우스 슈밥은 4차 산업혁명은
'3차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한 디지털과 바이오산업,
물리학 등 3개 분야의 융합된 기술들이 경제체제와
사회구조를 급격히 변화시키는 기술혁명'이라고
정의하며 이렇게 말했더군요.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고 일하고 있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기술 혁명의 직전에 와 있다.
이 변화의 규모와 범위, 복잡성 등은 이전에 인류가
경험했던 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1차, 2차, 3차 산업혁명을 뒤로 하고 도래할,
4차 산업혁명은 과연 ‘초연결성(Hyper-Connected)과
초지능화(Hyper-Intelligent)의 특성‘을 가지고, 인간과 인간,
사물과 사물, 인간과 사물을 상호 연결시키는 빅 데이터나
인공지능(AI)에 의한 첨단 인간형 로봇, 드론, 자율자동차
등이 상용화되는 ‘전혀 다른 사회’가 될 것 같습니다.
간간이 TV에서 방영되는 그런 미래사회에 관한 프로를
시청할 때마다 전 한편으로 이런 노파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또한 ‘전혀 다른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존엄성이나 인간미나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기계형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럴 것이 왠지 이런 성경 말씀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선악과를 따먹어도)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4차 산업사회가 도래하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3:4~5)
교활한 ‘뱀’ 곧 ‘사탄’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은 여자 하와나 그 남편 아담은 그 후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기’는커녕 되레 눈(靈眼)이 어두워져 사탄을 닮아 사탄과 같은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과의 영적 소통 관계가 단절되고 그래서 또한 인간성도 이웃과의 공동체성도 다 잃고, 죄와 살상과 고난과 저주와 죽음의 길을 갔습니다. ‘노아의 홍수 심판’에 이르는 길을 간 것입니다.
그런 전철을 따라 4차 산업시대 인간들 역시 인공지능형 기계를 닮아 기계와 같은 인간이 되어 인간성이나 이웃과의 공동체성을 다 잃고, 되레 죄와 살상과 죽음의 길을 가는 ‘심령이 메마른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첨단 산업이나 과학 이상으로, ‘거룩한 신앙’ 내지 ‘구별된 신앙’에 힘써야할 그래서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의 역량을 준비해야할 필연성 또한 거기 있을 것입니다. ’의인 노아‘처럼 세상 사람들이 다 비웃어도 묵묵히 ‘구원의 방주’를 짓는 ‘거룩한 고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가 쓴
〈풍차방아의 마지막 고집〉이라는
단편소설을 상고해봅시다.
거기 보면 산업사회에 밀려 붕괴 및 해체되는,
결코 비웃을 수만은 없는 농경사회의 비애와
차라리 우직한 고집 내지 거룩한 고집이 있습니다.
드디어 파리에도 ‘수증기로 돌아가는 기계방아’가 들어옵니다.
그러자 ‘풍차방아’는 일감을 잃고 모두 사라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풍차방아만은 여전하게
‘기계방아를 무시한 채 언덕 위에서 용감하게’ 돌아갑니다.
평생을 거기서 살아온 코르니유 할아버지의 풍자방아입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프로방스 주민들을 향해 외칩니다.
“(*기계방앗간) 저기 가지 마시오. 날강도 같은 놈들이 빵을 만드는데 악마가 발명한 수증기를 사용한다오. 그러나 난 하나님의 숨결인 북녘바람, 동녘바람과 함께 일을 하고 있소.”
그러나 그에게 일을 맡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노인의 풍차 날개는 여전히 꿋꿋하게 돌아갑니다. 저녁때면, 노인은 보란 듯이 밀가루가 든 포대를 실은 늙은 당나귀를 앞세우고 나다닙니다. 석연치 않다 싶은 마을 농부들이 사정을 물으면, 노인은 엄숙한 표정으로 큰 비밀이라도 털어놓듯이 말합니다.
“쉿, 사실 나는 수출하는 일을 맡아서 하고 있다네.”
누구도 그 이상은 알 수 없습니다. 그의 방앗간은 외부인의 접근이 불가능하도록 언제나 이중으로 굳게 잠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인이 외출한 어느 날. 그 방앗간의 서글픈 비밀은 마침내 탄로 납니다. 방아주축엔 먼지만 잔뜩 쌓여있을 뿐, 밀은 한 톨도 없었습니다. 그동안 보란 듯 당나귀에 싣고 나른 것은 수출용 밀가루가 아닌, 석고 부스러기나 백토였습니다.
활짝 열려있는 방앗간. 외출에서 돌아온 노인은 석고 포대 위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펑펑 웁니다. 산업사회에 밀린 채 버려져 일감을 다 잃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소신 내지 장인(匠人) 정신 하나로 버티며 살아왔던 설움이 와락 터진 것입니다.
“처량한 내 신세! 이젠 죽을 수밖에 없구나. 방앗간의 명예가 더럽혀졌으니.”
노인은 자신의 죽음보다도, 한평생 ‘하나님의 숨결인 북녘바람과 동녘바람과 함께 일해 왔던’ 천직(天職)에 대한 소명감 내지 사명감의 상실 곧 ‘방앗간의 명예가 더럽혀진 것’을 더 마음 아파합니다.
그때, 노인의 비밀을 알게 된 마을사람들의 당나귀들이 줄지어 풍차방아간의 마당으로 들어옵니다. 죄다 밀을 가득 실은 당나귀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일감을 얻은 풍차방아는 다시 힘차게 돌아갑니다. ‘콩 한조각도 나눠먹던(?)’ 마을의 인간성, 공동체의 관계성이나 배려성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방앗간의 명예’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고 노인이 세상을 떠난 후, 풍차방아도 그 날개를 멈춥니다. 아무도 그의 뒤를 이르려는 사람이 없었기에.
한편,
구약성경 안에도 저 노인처럼(?)
차라리 우직한 고집 내지 거룩한 고집을
가지고 살았던 ‘족속’이 있습니다.
‘레갑 족속’이 그들입니다.
저들은 순수한 이스라엘 민족이 아닙니다.
이방인 ‘겐 지파’ 후예들입니다.
모세의 장인인 르우엘과
출애급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낯선
광야여정을 안내하며 크게 도움을
주었던 르우엘의 아들 호밥 등의 후예입니다.
광야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소수 부족이었는데,
모세의 간절한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이스라엘에 합류한 족속인 것입니다.
-모세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마 하신 곳으로 우리가 행진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리라 하셨느니라.
호밥이 그에게 이르되 나는 가지 아니하리라.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
모세가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민수기10:)
그래서 마침내 모세와 동행 및 합류한 ‘레갑 족속’은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 정착한 이후에도 세속화되지 않고 그들 나름대로 부족과 신앙의 순수성을 잃지 않고자 여전하게 이스라엘 땅 안의 광야에서 유목민이자 나그네 생활을 합니다.
대기근을 만나, 당시 가족 ‘70명’ 모두를 데리고 아들 요셉이 실세 총리로 있던 애급으로 내려가 거주하게 된 ‘야곱’ 곧 ‘이스라엘’이 가족과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일부러 애급 왕에게 외지고 버려진 지역인 ‘고센 땅’(창세기46:28)을 자청했던 경우와 같은 형국이 됩니다.
-너희는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
우리가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모든 말을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자녀가 평생 동안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살집도 짓지 아니하며 포도원이나 밭이나 종자도
가지지 아니하고, 장막에 살면서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다 지켜 행하였노라.-(예레미야35:)
저들은 과연 ‘선조 요나답이 명령한(commanded)’ 그대로 우직하게 살았습니다. 필요 이상의 사심이나 탐심 부리지 않고 제 분수의 자리를 끝까지 지키며, 광야 같은 세상 ‘장막’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남 유다 왕국 말기에 활동했던 ‘선지자 예레미야’ 시대 당시 저 ‘우리 선조 요나답’은 이미 이백여 년 전 인물입니다. 그런데도 ‘레갑 족속’은 그 선조가 ‘명령한’ 곧 ‘지시한’ 가르침을 차라리 우직하도록 내내 그대로 지켜온 것입니다. 대단한 순종이자 순수한 신앙의 지조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 그 말씀에 불순종하며 온갖 죄악을 자행했고,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왕국으로 분단되어 결국엔 두 왕국 모두 각각 아시리아와 바벨론제국에게 멸망당했던 이스라엘 민족과는 크게 대조적인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한국선교’ 이백 주년은 아직도 먼데, 벌써부터 세속화되어 사회의 경원과 우려와 비판의 대상이 되어 있는 오늘 우리의 한국교회보다 되레 더 훌륭한 족속이 아닐 수 없다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친히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신실한 레갑 족속을 비교적으로 칭찬하며, 불순종과 죄악을 일삼는 유다(이스라엘)민족을 크게 꾸짖으며 탄식하십니다. ‘이방인’을 들어 ‘선민’을 꾸짖은 것입니다.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소수’를 들어 ‘다수’를 부끄럽게 하신 것입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은
그의 선조가 그들에게 명령한 그 명령을
지켜 행하나 이 백성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예레미야35:16)
그리고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란 듯이 들으란 듯이,
이방인인 ‘레갑 족속’을 공공연하게 축복하십니다.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하여 그의 모든 규율을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였도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a man to serve me)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예레미야35:18~19)
저 ‘내 앞에 설 사람’ 곧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라는 원어의 의미는 당시로선 성전 사역을 전담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지파의 보조역을 의미합니다만, 아울러 선민(選民)이라 자부하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 앞에 서는’ 참 구원은 육신적 그 혈통이나 전통이나 외식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순종하는 순수한 믿음과 삶이 일체화된 그런 ‘믿음’ 곧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아래 말씀에 대한 이중적 언약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 곧 진정한 ‘의인’이니까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1:17)
‘풍차방아‘ 저 천직에 대한 코르니유 노인의
’마지막 고집‘이나 저 이스라엘 세상 안의 유목민이자
나그네인 레갑 족속의 ’거룩한 고집‘이 한편으론
차라리 바보 같은 우직한 삶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약삭빠른 처세술이나 타산이나 실리에
발 빠른 사람들이 되레 성공하거나 승승장구하는
세상적 가치나 안목이나 평가 앞에서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를 참으로 살리는 것은,
조석으로 변하는 그래서 허무한 세상의 평가가 아닙니다.
세상 소유나 기복이나 기득권에 안주하는 그런 삶도 아닙니다.
’내 앞에 설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평가가
진정한 축복이자 정작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절대 진리와 생명의 길을
간다는 우리의 심령과 삶 중심엔 ‘풍차 방아의 명예’
아니 ‘선조 요나답의 명예’ 아니 ‘그리스도의 이름’이나
그 ‘명예’를 지키기 위한, ‘더럽히지 않기 위한’,
저 노인 이상의 ‘마지막 고집’이 있는 것일까요?
저 레갑 족속 이상의 '거룩한 고집'이 있는 것일까요?
아무쪼록 급변하는 세상 풍조나 산업사회의 조류에 휩쓸려
너무 물들거나 요동하지 않고, 신앙의 지조(志操)와
삶의 지조가 있는 일체화를 통해, ‘처음마음’과 ‘처음행위’를
잃지 않는 삶을 통해, ‘세상을 이기는’ 그래서 마침내 이웃인
‘마을 주민들 앞에 설 수 있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저나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여러 나라 가운데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한 이름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에스겔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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