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부의 우려와 견제에도 불구하고,
저 중국 땅에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은 다행한 일이라고 사료됩니다.
현재 중국 그리스도인들은 ‘공식적으로 약 3천만 명’
정도라고 합니다. 아무쪼록 성령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와 섭리를 통해 저 중국 땅에도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생명과 진리에의 복음과 그 본래적 공존의 가치관이
어서 속히 확산될 수 있기를,
그래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도 기여할 수 있는
역사와 섭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중국 복음화의 ‘위대한 선구자’이자 개척자였던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경건 신앙에
힘입어 ‘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계획과 포부와 사명감을 가지고
1853년, 21세의 나이로 낯선 중국 땅에 들어갑니다.
이후 중국인의 옷을 입고 중국인들을 헌신적으로 섬기며
살다가 1905년, 73세의 나이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만,
그런 ‘신앙위인’ 역시 초기 사역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닙니다.
학위도, 당시 사귀던 여자까지도 포기하고 중국으로 갔지만 그렇다고 낯선 땅에서의 선교사역이 새파랗게 젊은 그의 뜻이나 의욕처럼 진행 및 성사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언어 문제, 재정 문제, 향수병, 다른 선교사들과의 갈등 등 수많은 어려움이 수 년 동안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 무렵 허드슨은 매사에 자신을 잃은 채 큰 낙심과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의 어느 날.
친구 존 메카디로부터 편지 한 통이 옵니다.
그 편지 속엔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너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그리스도 안에 거하려고 노력해라.
‧‧‧ 그리스도는 선교와 봉사를 위한 유일한 능력이시오,
변함없는 기쁨의 근원이시다.-
저 평범한(?) 구절에서 성령의 큰 감동을
받은 허드슨은 훗날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그 후 나는 예수님만 의지했습니다. 그러자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나의 사역은 풍성한 것도 아니었지만 결코 어려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자기 스스로를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 의지한’ 허드슨은 그래서 50년 이상의 생애를 ‘기쁘게’ 헌신 및 희생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 자녀들을 병으로 잃고, 연이어 32살의 아내마저 병으로 잃는 등 무수한 내외적 환난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 모든 역경을 감내하며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살아계신’ 그래서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이자 현존의 신비를 ‘분명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 ‘위대한 선교사’ 허드슨의 경우처럼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선
선교나 봉사는 물론이고, 세상의 사회생활
그 모든 범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보다
‘내 손’이 먼저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걸음’보다 ‘내 걸음’이
먼저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는 사자성어처럼
자기 뜻이나 자기 신념이나 자기 의욕이나 자기 밧줄로
자기 인생을 묶어놓고, 애꿎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낙담이나 좌절에 빠지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념과 신앙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신념이 자기중심이자 자기 뜻 내지 자기이성(理性)
중심이라면, 신앙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중심이자
그 뜻 그 말씀 중심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태복음16:24)
과연 ‘주의 종’이라고 해서, ‘주의 일’ 한다고 해서, 고난이나 고통이 없는 게 아닙니다. 뜻 있는 삶, 가치 있는 삶은 차라리 이기적인 기복신앙이나 만사형통과는 거리가 되레 멉니다. ‘주의 길’은 되레 ‘자기 십자가’를 각오하고, 자원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발적인 ‘자기 십자가’가 없는 ‘제자’나 ‘목자’는 그래서 그것이 ‘삯꾼’이라는 ‘직업’이 될 수는 있어도 참 제자나 참 목자일 수는 없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그럴 것이 ‘제자의 도’는 그 첫걸음부터가 ‘자기를 부인하는’ 데서 시작되어 ‘저 높은 곳’이라는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성숙 및 성화에의 행보이자 삶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를 부인‘해야 할 필연적 이유는 크고 작은 천하 범사에서 그 모든 ‘인도’나 ‘준비’나 ‘결정’이나 ‘성취’를 하는 주체는 궁극적으로 ‘자기’가 아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고집하면 할수록 되레 자기 걸음만, 자기 운명만 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determines)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16:9)
저 ‘인도하다’ 곧 히브리어 ‘쿤’은 ‘결정하다, 예비하다 이루다, 성취하다’ 등의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길, 자기 걸음을 ‘예비하고, 결정하고, 이루고, 성취하는’ 그 모든 역사와 섭리가 자기 노력 자기 신념대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역사와 섭리의 주체이자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제비나 주사위는 사람이 던져도 그 모든 결정(decision)은 하나님이 하신다’(잠언16:33)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모르거나 전혀 믿지 않는 이른바 무신론자도 ‘내 신념, 내 노력, 내 주먹, 내 능력’으로 돈을 벌어 ‘부자’가 될 수 있고, 심지어 교활한 권모술수를 써서 ‘왕’이나 ‘대통령’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성경은 ‘하나님이 인도하시지 않은’, ’하나님이 내버려두신‘(로마서1:24), 그 모든 세상의 성공이나 사욕이나 탐욕은 그 결국이 허무이자 허망이자 오욕이자 심판이라고 증언 및 확언하고 있다는 그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그 시작과 진행과 종말까지도 ‘결정하시고, 성취하시는’ 곧 인생의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살든지 죽든지’ 모든 것을 맡기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살 때 되레 심령에 참 평안과 기쁨이 오고,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걸음소리를 듣고 뒤따를 때 되레 하늘의 참 복이 있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 유종(有終)의 구원이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로 그 땅을 얻게 하라.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신명기31:7~8)
2018년, 새해가 열렸습니다.
새해, 새 땅, 가나안 땅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모세는 온 이스라엘과 그 제자 여호수아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그 제자들인 온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하게 저 ‘계시된 말씀’으로 우리를 격려하고 계십니다.
여호수아도, 허드슨 테일러도, 오늘의 우리도,
‘자기 혈기, 자기 노력, 자기 능력, 자기 신념’만 믿고 나아간다면
실상인즉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되레 ‘교만’입니다. 그리고
그 ‘교만’의 끝은 ‘두려움과 놀람’입니다. 허무이자 허망이자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체성이 태생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는 그래서 늘 이기적이자 자기중심적인 인간 우리의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를’ 때 되레 ‘앞서 행하시며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그 신령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래서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지 않는 삶’ 곧 세상의 모든 환난이나 풍파를 ‘넉넉히 이기는’ 평안과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righteousness)와
평강(peace)과 희락(joy)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로마서14:17~18)
진실로 그렇습니다.
사람은 먹고 마시는 ‘떡’만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주색만으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밀림이나 경제 동물의 세계 그 이상의 가치인 ‘말씀’의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에 열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 세상의 온갖 풍파나 환난이나 악이나 두려움 등을 넉넉히 이기는 영원한 가치인 ‘의와 평안과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여느 동물과는 달리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인 영혼을 가진 인간을 진실로 살리는 능력은, 영원히 살리는 저력은 ‘성령 안에 있고’. ‘말씀 안에 있는’ 그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가치이자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저 위대한 ‘로마서’를 후세에 남긴 사도 바울처럼 ‘자기 십자가를 각오한 자’ 곧 고난은 물론이고 죽음조차도 각오한 자에게는 ‘먹고 마시는’ 차원의 가난이나 ‘육신의 가시’인 질병, 나아가 병사(病死) 혹은 처참한 순교조차도 두려움이나 놀람의 대상은 이미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배신도, 환난도, 죽음조차도, 그것을 이미 각오한 자에게는
그것이 되레 ‘친구’일 수 있고, ‘유익’일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은 삼십’에 팔았던 가룟 유다가
‘칼과 몽치’로 무장한 ‘큰 무리’와 함께 체포하러 왔을 때
그들을 의연하게 맞이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friend),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은지라.-(마태복음26:50)
사도 바울의 결연한 각오이자 고백도 함께 들어봅시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to die is gain).-(빌립보서1:21)
상대적으로,
저 모든 세상의 사건이나 환난이나 풍파가 오늘 우리의 증오나 원한이나 원망이나 두려움이나 불안이나 기피의 대상이 되어있다면 그것은 곧 저나 우리가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믿음과 소망과 사랑 위에 서있지 않다는, 영원한 부활 생명 위에 서있지 않다는 반증일 수 있을 것입니다.
각설하고,
아무쪼록 인생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앞서 행하시며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저 신령한 비밀이자 영성의 비밀이 저나 우리 모두의 것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래서 진실한 ‘하늘의 복’과 ‘산 소망’이자 ‘영원한 소망’ 그 자체가 우리와 ‘항상 함께 있는’ 새해가 될 수 있기를!
-(*예수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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