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영혼의 '윤회설'과 '타락설' 사이

이형선 2018. 1. 8. 11:21



기원전 6세기를 살았던

수학의 원조이자 사모스의 현인이라고

불렸던 피타고라스는 사모스에서 태어났으나,

이집트나 인도 등지를 여행하면서 학문을

배우고 구도에 힘썼다고 합니다.

그 결과 힌두교나 불교의 교리처럼

영혼의 윤회설(輪廻說)’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불멸하는 그 영혼은 그 육체가 죽은 이후 사자(死者)의 거처로 가서 머무르고 있다가 다시 사람이나 짐승의 신체 속에 들어가 거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타 동물을 사람과 동등시하며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짐승도 되고 짐승이 사람도 되며, 그렇게 윤회하다가 영혼이 완전히 정화되었을 때 마침내 최초에 출발한 근원으로 귀환한다는 것. 이른바 해탈(解脫)’의 경지가 되겠지요.

 


영국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쓴

베니스의 상인에 보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그레시아노가 피도

눈물도 없는 간악하고 비정한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퍼부어대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네 놈을 보고 있으면 내 믿음까지도 흔들려오고,

 피타고라스처럼 짐승의 영혼이 인간의 육체 속에

 들어왔다는 생각을 가지고 싶은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네 놈의 그 들개 같은 근성은 원래 늑대에 깃들어있던 것이다.

 ··· 그 영혼이 네 놈 속에 들어간 것이다.”

 


저런 유형의 인간에 대한 회의나 감정은

또 다른 형태로, 역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불세출의 지혜자솔로몬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인생들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리니 그들이 자기가 짐승과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전도서3:19~20)

 


진실로 그렇습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름이 없음은’, 구별 내지 성별됨이 없음은 그 인생 자체가 헛됨이고 허망입니다. ‘해 아래’(전도서1:3) 있는 세상에는 새 것도 영원한 것도 없는데 거기에 매달려 한세상 짐승처럼 살다가는 삶으로 끝나면 과연 너무 허무합니다. 물론 짐승들도 동물의 세계가 그런 것처럼 사람들 못지않게 먹고 살기 위해 치열하게 삽니다. 권력에의 의지도 있어서 무리들 중 가장 강한 자가 대장이 됩니다. 자기 새끼 사랑하며 잘 키울 줄도 압니다. 때론 자기 새끼들 지키려다 대적에게 대신 잡아먹히는 안타까운 경우까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짐승들은 해 위의 나라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짐승보다 뛰어날 수 있음도’, 구별 내지 성별될 수 있음도 오직 거기 있습니다. ‘()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만물의 영장(靈長)’일 수 있음이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는 영원(eternity)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도서3:11)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뭡니까?

내세를, ‘해 위에 있는 하늘나라(天國)를 사모하는 마음이자 부활 생명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구원을 사모하는 메시야 대망사상일 수 있습니다.

마침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솔로몬보다 더 큰 자인 자신의 정체성을 이렇게 설파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한복음8:23)

 


인간 우리는 해 아래서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해 위에서났다는 것입니다. 인간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나라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해 위에서나는 거듭남의 세계를 알지 못하면 저 피타고라스의 경우처럼 사람이 죽어 짐승이 되고 짐승이 죽어 사람도 되는 영혼 윤회설에 빠지거나, 저 솔로몬의 경우처럼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라는 허무주의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 사역 제일성으로 회개하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인생의 방향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먹을 것 마실 것이라는 경제 중심이나 남을 섬기기보다는 지배하려는 권력이나 패권 중심의, 짐승들과 다를 바 없는 그런 해 아래중심의 가치관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天國)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태복음4:17)

 


성경은 영혼의 윤회설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영혼의 타락설(墮落說)’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저 윤회설과 대비되는,

성경에 나타난 사후세계에 관해 좀 살펴봅시다.

예수께선 세상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영혼과 받지 못한 영혼으로

양분된다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그 거지(*나사로)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날마다 호화롭게 지내면서 자기 집 대문 앞에 버려진 거지 나사로에게는 무관심했던)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누가복음16:)

 


물론 저 비유에게 나사로가 회개했다거나 신실했다는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고할 것은 나사로란 이름 자체가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God is my helper)’이라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비록 병들어 버려진 거지였지만 그의 이름이 그의 신앙인격을 대변하고 있고, 주님께서 친히 기억하시는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에겐 이름이 없습니다. 그냥 부자라고만 언급되어 있을 뿐입니다. 행세하며 사치할 줄은 알아도 이름이 없는 부자, 인격이 없는 부자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이름조차 모르는 세상의 부자일 뿐인 것입니다.

 


여하간 나사로의 영혼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품이자 낙원’(누가복음23:43)파라데이소스로 갔습니다. ‘부자하데스음부(陰府)’라는 중간기 처소로 갔습니다. 성경은 죽은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 저 중간기 처소에 머물고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세상에서 심은 그대로 종말론적 최후심판인 백보좌 심판’(요한계시록20:)을 받고 이후 각각 새 하늘과 새 땅천국혹은 지옥으로 가게 된다고, 계시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나타난 사후(死後) 세계의 대략입니다.

 


물론 저도 사후세계에 대해 잘 모릅니다. 성경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하긴 말이나 글로 보이지 않는 세계천국을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천국이 아니겠지요. 영성이나 초월성은 그것을 체험적으로 맛보아 아는 자의 세계이니까요. ‘빛의 세계가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낮에 분명히 볼 수 있는 날 때부터 맹인인 분에게 말이나 글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또한 그래서 어둠빛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어도 제물에 녹초가 되어 들어갈 수 없는 법이겠지요.

 


그럼 인간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든 어둠들개나 늑대 같은 근성을 포함한 그 모든 악()한 성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기를 포기한흉악 사건이나 탐욕적인 부정부패 사건 등의 뉴스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오늘도 사도 바울처럼 거룩한 탄식을 토로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호라 나는(*우리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우리를) 구해내랴?-(로마서7:24)

 


저 문제에 대한 답이 진정으로 풀릴 때 비로소 나의 구원, ‘우리의 구원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과연 인간이 곤고한것은, 때론 짐승처럼 비참한것은, 성령(聖靈)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타락한 죄인이 되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간의 정체성 이해처럼, 성령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하면 절대선이신 하나님을 닮아 선한 인격이 될 텐데, 조상 아담 때부터 타락해서 악령(惡靈) 곧 사탄과 교제하며 사탄의 지배를 받아 금기의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되레 사탄을 닮아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마가복음7:21~22) 같은 악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고 있다는 반증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그런 열매가 곧 이라고 은유 내지 암유되는 악령 곧 사탄의 정체성 그 자체이니까요.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세기3:1)

 


간교하다곧 히브리어 아룸빈틈없다, 능란하다, 명철하다는 의미를 함께 가집니다. 따라서 자체가 아닌, 타락한 영들 곧 마귀나 귀신 등 악령들의 수괴인 사탄을 의미하는 상징계시라는 것입니다.

악령들이 지배하는 인간일수록 감히 하나님과도 대적하리만큼 때론 빈틈없고, 능란하고, 명철한까닭도 다 거기 있습니다. 미련한(?) 짐승은 죽었다가 영혼의 윤회설에 의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 해도 결코 그럴 수는 없으니까요.

 


신앙의 유무를 떠나서, 인간은 짐승과 달리 자유의지가 주어진 만물의 영장(靈長)’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유의지가 주어졌다는 것은 세상의 삶에서 그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그리고 선택해야만 하는 대상이 분명히 있고 또한 항상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불행하게도 우리의 조상 첫째 아담은 그 자유의지사탄을 선택하고 그 사주를 받아 되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창세기2:17)이자 하나님의 금기의 말씀을 따먹어버리고 말았다는 데 있습니다. ‘스스로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되고자하다가, 스스로 도통해서 신이 되고자 하다가, 그 교만 때문에 되레 타락한 영혼이 되고만 것입니다.

 


물론 그런 창세기의 기록은 고도로 계시적이자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인간 우리에게 현상적으로 실재하는 영적 세계의 비밀을, “오호라 나는(*우리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실존적 고뇌 및 난제에 대한 비밀을 선지자 모세가 아닌 그 누구라도 더 이상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윤회설을 믿는 다른 종교들은 윤회할 수밖에 없는 그 기원에 대해 그나마의 언급조차도 서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적세계나 사후세계에 관한 지식 역시 그 이상으로 인간들에게 필요했다면,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언급해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밀하게 해두는 것이, 저 솔로몬의 고백처럼 보다 심오한 뜻과 이유가 있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해두는 것이, 인간들이 추상적 꿈이나 비전을 품고 하늘나라를 동경하며 사는데 차라리 더 유익할 수 있다 싶어 그 정도의 계시에서 멈추셨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그럴 것이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말씀을 들려준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거역하고 따먹어버린 첫째 아담인데, 그런 죄인의 후예들에게 구체적인 천국의 조감 투시도를 보여주고 쥐어준들 그대로 믿고 따라오겠습니까? 어림없겠지요. 역시 거역하며 찢어버리고 말겠지요. 그래서 되레 영영 구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고 말겠지요.

 


각설하고,

그럴수록 우리가 분명하게 해둘 것은, 조상 때부터 타락한 인간 우리의 영적 정체성이 타락 이후 성령(聖靈)이신 하나님과의 본래적 영적 소통관계는 단절이 되고, 악령(惡靈)인 사탄의 세력과 영향력 아래서 사는 죄인이 되어 있다는 현상적이자 실존적 이해 그것입니다. 모순이나 부조리, 불안이나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래서 첫째 아담의 후예인 인간 우리는 아담이 사탄의 미혹에 의해 무너진 것처럼, 예나 지금이나 우리보다 더 강한 사탄의 능력, 악령의 능력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살인이나 간음이나 탐욕이나 질투나 교만더러운 죄를 짓고 싶어서 짓는 사람이 누구 있겠습니까? '평안'이 아닌 '불안', '담대함'이 아닌 '두려움' 속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 우리의 심령에서 더러운 악령이 주인노릇을 하면 절로 그렇게 악한 열매’, ‘허무한 인생의 열매를 맺기 마련인 것이지요.

 


개인적인 신앙고백을 하자면,

저 역시 사도 바울처럼 내 속에 공존(共存)하는 선과 악의 이중성이나 모순, 악이나 죄()의 간교함을 절감했기에, 세상도 인생도 윤회설의 무대가 아닌 성령과 악령의 비밀하고 치열한 영적전쟁 무대임을 또한 절감하며 이후 타락설을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때론 옹졸하도록 때론 위선적이도록 작고 좁은 인간 내 능력, 내 머리만으론 악령이나 죄악을 이길 수 없다는 한계를 절감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인간 나, 이대로는 안 된다, 이건 죽어야한다, “거듭나야만 한다, 참 구원에의 명제이자 구도이자 갈구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의 유일한 해법이자 절대해법은 혈()과 육() 중심의 태생적 정체성부터가 이미 타락한 죄인인 내 대신 죽은 희생양이자 둘째 아담이신, 악령의 간교한능력과 사망의 권세조차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거듭날 수 있다는 복된 소식(福音)’ 그것이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인간 우리는 먼저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거듭나야만, 그래서 그리스도를 곧 성령과 말씀먹고 마시며그 은혜 그 도우심을 받으면서 살아야만 비로소 자기보다 더 강하고 간교한악령을 이기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라디아서5:22)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람도 세상도 서로 살리는 그래서 진실로 서로 복되고 가치 있는 참 인격의 열매를 하나라도 더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서로 살리는 하나님의 나라, ‘성령의 나라, 어서 속히 이 땅 위에 이루어질 수 있게 되기를!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에베소서6: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