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기 대학자이자
조선왕조 건국 공신인 정도전(鄭道傳).
주지하다시피 고려왕조의 개혁파 지식인이었던
그는 구세력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 되어
유형생활을 하다가, 정몽주가 살해 된 뒤 석방되자
곧 조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합니다.
그래서 고려시대를 마감하고 조선왕조를
개국한 일등공신이 됩니다.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위하는
나라만이 크게 발전할 수 있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고려왕조말기시대 같은 정치적 경제적 모순과
사회적 혼란과 불안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선
제왕 중심의 전제정치가 아닌, 재상(신료) 내지 백성
중심의 개혁정치가 절대 필요하다는 소신에 따라
그런 체제를 혁명적으로 추진하다가
왕자 이방원의 견제와 역공을 받아 ‘역모죄’라는
누명을 쓴 채 참수당하고 말았습니다.
다방면의 학문에 해박했고, 도량도 크고, 기상도 호탕했다는 정도전은 조선 건국 후 그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 궁에 출근할 때면 ‘한 발에 흰 신, 한 발에 검은 신’을 신었다고 합니다. 서리들이 그것을 귀띔해주어도 “말을 타고 나올 때, 보는 사람은 한쪽만 보니 상관없다”며 바꾸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른바 ‘일백일흑(一白一黑)’인데, 그 퍼포먼스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요? 고려와 조선, 왕권(王權)과 신권(臣權), 보수와 진보 등의 흑백 논리를 그가 타고 가는 ‘말’이라는 세상 내지 무대에서 하나로 아우르고 싶었던 그의 비전이자 실천적 의지 아니었을까요?
물론 정도전은 그런 그의 뜻이나 통치이념을 이루지 못하고 되레 ‘역적’이 되어 비명에 죽고 말았습니다만, ‘백성이 나라의 주인’인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 우리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런 그의 죽음은 시대를 너무 앞선 선각자의 불행일 수도 있다 싶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남겼다는 시조를 다시 들어봅시다.
-30년 세월 온갖 고난 겪으면서 쉬지 않고 이룩한 공업,
송현방 정자에서 한 잔 술 나누는 새 다 허사가 되었구나.-
한편,
저 유명한 솔로몬 왕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두 세력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초대 왕이었던 사울 왕 지지파인 북 이스라엘 세력과
2대 왕이었던 다윗 왕 지지파인 남 유다세력이 그들입니다.
다윗 왕이 분단된 저 두 세력 및 지역을 통일시켜 다스리다가
70세를 일기로 죽자 그 아들 솔로몬이 역시 통일왕국의
왕으로 즉위해서 ‘40년’ 동안 다스립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집권 후기에 타락과 실정을 일삼자
북 이스라엘 세력의 불만이 다시 고조됩니다. 심지어
‘큰 용사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열왕기상11:40)
그렇게 어지러운 시국에, 6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나이에 솔로몬 왕은 죽습니다. 그러자 ‘41세’이던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으로 즉위합니다. 르호보암은 솔로몬 왕이 이방여인인 ‘암몬 여인 나아마’에게서 얻은 아들입니다. 차기 왕으로서의 자질이나 지혜나 품격과는 상관없이, 솔로몬 왕의 유일한 독자였기에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습니다.
그런 르호보암 왕은 집권 초부터 부왕 솔로몬 시대의 과중한 부역과 세금 등 그 ‘멍에’의 개선을 요구하는 백성들 특히 북 이스라엘 세력들의 원망과 민란의 소요에 빠지자 그 정치현안의 해법을 찾고자 중신들과 의론하게 됩니다. 원로들의 대답인즉 이렇습니다.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열왕기상12:7)
‘자기와 함께 자라난’ 측근들이자 젊은 신하들의 대답인즉 이렇습니다.
-왕은 대답하기를 내 새끼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하소서.-(열왕기상12:10~11)
르호보암 왕은 후자를 택합니다.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저들을 좋은 말로’ 잘 포용하라는 원로들의 충언을 버리고, 강압정치를 주창하는 젊은 또래들의 혈기와 소견을 그대로 시행합니다. 그러니까 ‘말 탄 권력’으로 진압 폭력을 자행한 것입니다.
과연 권력이나 재물이 눈앞을 가리면 사람이 한없이 교만해지고 그래서 어리석어집니다. 그 결국은 남북 분단의 비극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솔로몬 치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애굽으로 망명했던 여로보암을 왕으로 옹립해서 ‘북 왕국’이 되어 떨어져 나가버린 것입니다.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열왕기상12:19)
그러니까 정도전의 저 퍼포먼스 지혜 그대로 ‘한 발에 흰 신, 한 발에 검은 신’을 신어도 ‘30년 세월의 공업이 한 잔 술 나누는 새 다 허사가 되고’, 저 르호보암 왕처럼 두 발에 다 ‘흰 신(보수?)’ 아니 ‘검은 신(진보?)’을 신고 강압정치를 구현해도 민심이 진정되기는커녕 되레 남북이 분단되어 비극과 불행의 골짜기만 깊어졌을 뿐입니다.
상대적으로,
그럼 인간을 진정으로 살리는,
성전을 개혁하고 세상을 개혁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나 진리는
저들과 무엇이 다를까요? 그것을 좀 고민하며 묵상해봅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성향이나 지향이 시쳇말로 ‘보수’일까요, ‘진보’일까요? ‘흰 신’일까요, ‘검은 신’일까요? 둘 다 아니고, ‘샌들’을 신으셨다고요? 하긴 그것도 옳은 말씀입니다. 실인즉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성향은 보수도 진보도 아닙니다. 때론 보수적이고, 때론 진보적이자 개혁적입니다. 그러면서 그 둘을 ‘통일’시키고 있습니다.
예컨대 세속화된 ‘성전의 정화’를 위해 성전에서 양이나 소 등을 팔며 ‘장사하는 무리를 채찍으로 내어쫒는’ 모습은 개혁적이자 진보적입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쫒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요한복음2:15~16)
또한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질타하시는 모습 역시 그렇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요한복음7:7)
비교적으로,
보수적인 모습 역시 두 군데쯤 살펴봅시다.
망국의 설움을 안고 로마의 속국으로 살고 있는 당대 이스라엘의 상황에서, ‘바리새인이나 헤롯당’ 같은 적대세력들이 ‘로마에 바치는 무거운 세금 문제’라는 정치적 난제를 들어 시험한 것은 참으로 간교한 계략이었습니다. 그럴 것이 그것을 시인하면 ‘조국 앞에서 매국노’가 되고, 부인하면 ‘로마 앞에서 반역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명답을 직접 들어봅시다. ‘하나님 앞에서’의 명답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동전 데나리온)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마가복음12:16~17)
그리스도께선 ‘구약 율법’에 대한 이해 역시 보수나
진보 식 양극단의 대립적 입장에서 접근하지 않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태복음5:17~18)
그렇듯 예수 그리스도께선 정치적 ‘로마 가이사의 세상’이나 종교적 ‘하나님의 나라’를 둘 다 인정하셨습니다. 둘 다 수용하셨습니다. 그러나 구별하셨습니다. 성별하셨습니다.
신약의 복음만이 아니라, 구약의 율법도 그 정의도 인정 및 수용하셨습니다. 그러나 구별 및 성별하셨습니다. 그것을 ‘완전하게 하려고’ 왔다는, 명확한 자신의 정체성을 통해서 말입니다. ‘대속물(ransom)’ 곧 ‘희생양’이라는 자기희생을 통해서, ‘정의를 위한 정의’가 아니고 ‘사랑을 위한 정의’이자 ‘구원을 위한 정의’의 성취를 통해서 말입니다.
과연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선 저 모든 것을 하나로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다 이루셨습니다.’ 말을 바꾸자면, ‘만유를 통일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도, 구약과 신약도, 보수와 진보도, 우파와 좌파도, 다 ‘통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3위1체’ 되신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뜻이자 성품이자 정체성 그 자체이니까요.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위에 계시도다.-(에베소서4:)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저 조선의 선비 정도전처럼 ‘한 발에 흰 신, 한 발에 검은 신’을 신으신 분일 수 있다고 사료됩니다. 그 양쪽을 다 포용해서 하나로 ‘통일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저 두 분에 대한 ‘하늘(하나님)의 평가’는 전혀 달랐습니다.
저 정도전은 솔로몬 왕의 40년 치적 그것처럼, ‘30년 세월 온갖 고난 겪으면서 이룩한 공업이 한 잔 술 나누는 새 다 허사가 되었고’, 피차 죄와 허물과 결함이 있는 그 양쪽을 다 포용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업은 되레 영원한 부활 생명이자 승리로 증명되었으니까요.
그럼 그 차이나 그 요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세상에는 솔로몬 왕이나 정도전 같은 정치인도, 경제인도, 법조인도, 학자도, 문화인도, 평범한 직장인도 다 필요합니다. 있어왔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들 대개의 ‘공업’이 ‘한 잔 술 나누는 새 다 허사’가 되는 그 요인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물론 예수 그리스도는 ‘참 신성과 참 인성을 가진 메시아’입니다. 그래서 범인인 인생 우리들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로 비교할 수 있다면, 저는 그 차이나 요인을 저 정도전은 정치권력이라는 ‘말’을 타고 그 위에서 ‘한 발에 흰 신, 한 발에 검은 신’을 신고 ‘입성’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겸허하게 섬기는 삶’ 그 자체를 상징하는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고 그 위에서 ‘한 발에 흰 신, 한 발에 검은 신’을 신고 ‘입성’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엔 실로 구약과 신약을 하나로 연합 및 통일 및 성취시키는 그리스도의 분명하고 비밀한 ‘행위계시’가 있습니다. 그럴 것이 저 말씀은 구약의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이기도 하니까요.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요한복음12:14~15)
그렇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것이 ‘시온의 딸’을 살리는 참 왕도(王道)’이자 ‘대한의 딸’을 살리는 참 왕도입니다. 참 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해서, ‘말’이나 ‘노새’를 탈 능력이 없어서, ‘나귀 새끼’를 타신 분이 분명 아닙니다. ‘시온의 아들딸’을, 인생들 내지 백성들을, 가난한 자나 무력한 자들을, 배려하며 그들을 살리기 위해 자원해서 초라한 ‘나귀새끼’를 타신 분입니다.
이른바 보수도 진보도, 다 좋고 다 필요합니다. 견제가 있어야 중심도 잡히니까요. 공중의 새도 ‘좌우 두 날개’로 나니까요. 이 시대의 화두가 되어있는 ‘교회개혁’도, ‘정치개혁’도, 다 좋고 다 필요합니다. ‘한 발에 흰 신을, 한 발에 검은 신’을 신은 포용력이나 통합 의지나 비전은 그래서 더욱 좋고 더욱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 모든 좋음이나 필요보다 더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 모든 소신이나 비전을 추진하는 삶의 중심 자세입니다.
‘말’을 타고 성공한 개선장군이나 일등공신임을 시위하며 가는 길의 차라리 교만한 ‘내로라’의 삶과 타고난 귀족 신분 내지 ‘금수저’라는 기득권 신분임을 유세하며 ‘노새’를 타고 가는 길의 차라리 안일한 삶과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고 가는 길 그래서 이웃 내지 민초들의 상대적 탐욕이나 박탈감을 전혀 자극하지 않는 차라리 초라하도록 겸허한 삶은 전혀 다르니까요.
과연 옳은 일, 선한 일을 할수록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스스로 의롭다는 인간 자기의 교만이나 배타적 독선이나 과시가 적(敵)이나 안티 세력을 만들고 그래서 불행을 자초하기 마련이니까요.
우리는 지금 무엇을 타고 가는 인생길이자 나그네길일까요?
“잘 살아보세”라는 한국사회의 ‘번영’과 궤도를 같이해 온 한국교회는 그래서 남들보다 더 크고 좋은 ‘말’이나 ‘노새’를 타고자 경쟁하는데 급급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또한 ‘구별된 삶’, ‘성별된 삶’을 가르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분명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참 축복이자 영원히 사는 그리스도의 참 생명의 길은 되레 ‘새끼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에 있다는 그것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리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20: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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