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편지

서양 문명을 낳은 '4개의 사과'

이형선 2018. 1. 29. 10:07



자고로 서양의 문명이자 인류의 문명은

‘4개의 사과가 낳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따먹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인 금단의 사과’.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을 발발하게

한 세 여신들의 불화의 원인이 된 파리스의 황금 사과’.

만유인력이라는 법칙을 발견하게 한 뉴턴의 사과’.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 있던 스위스가 독립을 쟁취하는

봉화불이 되었던 빌헤름 텔의 사과가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에 나오는 금단의 사과는 곧 유태교나 이슬람이나 기독교 등 종교의 뿌리인 헤브라이즘을, ‘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파리스의 사과는 곧 이성(理性) 내지 철학의 뿌리인 헬레니즘을, ‘뉴턴의 사과는 근대 과학의 뿌리를, ‘빌헤름 텔의 사과는 근대정치사상이라는 문명의 뿌리를 각각 형성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개인용 컴퓨터나 스마트폰의 개발 및 대중화를 통해 현대정보화시대를 연 천재 스티브 잡스의 사과(*애플)’를 추가해서 ‘5개의 사과론을 개진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유태계 미국인이었던 고() 스티브 잡스가 애플이라는 회사명과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를 로고로 정한 것에 대해 여러 가지 구전된 가설이 있던데, 정확한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21살 때 단돈 700달러’, 백만 원도 안 되는 그 돈으로 오리건주 사과밭에서 사과창고로 쓰던 낡은 건물을 빌려 그 밭의 낙과로 굶주린 배를 채우며 새로운 컴퓨터 개발에 힘썼던 그 배고픈 초기 창업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합니다. 따라서 청년들일수록 스티브 잡스의 사과는 많이 먹을수록 좋겠다 싶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시대가 과학화 및 정보화되면 될수록,

먹을수록 좋은 사과가 있고 먹어서는 안 될 사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늘 먼저 그것을 구별 내지 성별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참 인간성 및 존엄성을 가진 인간이기 위해서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2:)

 


물론 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금단의 열매(Forbidden Fruit)’사과라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예전부터 선악과아담 애플(Adam’s Apple)’ 운운하며 사과로 구전(口傳)되어 온 것일까요? 모르긴 몰라도, ‘전무후무한 지혜자솔로몬의 그 지혜에서 비롯된 것 같다 싶기도 합니다. 그럴 것이 그는 말씀금 사과로 표현하고 있거든요.

 


-경우에 합당한 말(word)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apples of gold)니라.-(잠언25:11)

 


솔로몬의 아가에도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apple tree)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아가2:2~3)

 


히브리 원어에도 전자나 후자 둘 다 타푸아흐로 되어 있습니다. ‘사과, 사과나무를 의미하니까요. 그러니까 수풀 가운데혹은 동산(?) 가운데최고의 가치를 사과나무에 두었고, ‘합당한혹은 지당한 말씀의 가치를 역시 사과에 두었다는 데서 그 구전의 정서를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 것입니다.

 


각설하고,

하나님의 금단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창세기3:6)의 열매 곧 선악과를 아담 부부가 따먹어버린 것은 한마디로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될 것이라는 악령의 미혹 때문이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영적 교만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자기의 그 교만에 스스로 속아서 아담 내외는 물론이고 그 후손들 역시 죄악과 불행과 죽음의 길을 가는 숙명을 자초했습니다.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오바댜1:3)

 


문제는 첨단과학 내지 첨단문명 시대인 오늘도 여전하게 아담의 후예인 인간 우리들이 피조물이라는 인간의 한계와 분수에서 벗어나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행태가 사회 각계 각 분야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는 그것입니다. 창세기적 사건이 현재 오늘 우리의 사건이자 우리 사회나 지구촌의 사건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 우리 한국이나 타국이나 국제적 관계를 막론하고, 정치권력을 가진 자가 그 권력으로, 경제 권력을 가진 자가 그 금력으로, 보다 많은 이성적(理性的) 지식을 가진 지식인이 그 지식으로, 보다 큰 힘이나 주먹이나 능력을 가진 자가 그 힘이나 주먹이나 능력으로 이웃내지 내지 타국을 섬기기는커녕 되레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어이른바 갑질을 일삼는 타성이나 세태가 오늘도 역시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으니까요. 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 인간들의 그런 교만, 그런 악순환은 계속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숙명이나 숙제는 과연 권력이나 재물 등의 소유로 풀어지는 문제도 아니고, 한계를 살다가는 일개 피조물인 내가 고행이나 수행을 해서 득도하거나 학문에 힘써 박사가 되었다고 해서 풀어지는 문제도 아닙니다.

그럴 것이 권력이나 재물이나 무력 등의 힘을 남달리 소유하거나, 스스로 도통하거나 박사가 될수록 남달리 교만해지기 마련이니까요. 그것이 태생적으로 타락한 유전자를 가진 인간의 정체성이자 비본래성이니까요.

따라서 진정한 나의 구원, 우리의 구원의 문제는 과연 가출했던 탕자(蕩子)'가 그랬던 것처럼(*누가복음15:) 오직 회개하고’, 겸손하게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갈 때 비로소 풀어지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먹어야할 세상의 사과는 다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하나님의 사과는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와 나의 심령 중심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만은 구별, 성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것마저 먹어버리면 결국 너도 죽고 나도 죽기 마련이니까요. 갑도 죽고 을도 죽고, 아군도 죽고 적군도 죽기 마련이니까요.

 


물론 현대인인 우리는 뉴턴의 사과과학의 열매를 무시할 수 없고,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또한 세상의 정치나 경제의 열매도, 문학이나 철학이나 예술의 열매 같은 헬레니즘(理性)의 열매도,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다 임의로 먹어도되는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사과역시 임의로 먹어도 되는 것입니다. 많이 먹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만은 임의대로먹어선 안 된다는 것, 그것만은 구별 내지 성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함이 살아있을 때 비로소 그 거룩함을 닮아 세상도 인간도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첨단과학 내지 산업사회가 되어갈수록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조차 임의대로 먹고보란 듯이 탕자(蕩子)’무신론자(無神論者)’유물론자(唯物論者)’가 되어가는 그래서 스스로 아버지 없는 자식’, ‘낙원을 잃어버린 자식이 되어가는 현대인들이 과연 행복하던가요? 과학문명이 보다 편리하게 발전하고, 경제가 보다 부요하게 번영할수록 그래서 인간들이 배가 부를수록외려 탐욕은 더 커지고 되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 자기집단이나 자국(自國)중심적으로 동물화 내지 비인간화되어가지 않던가요?



그런 세태를 확인하면 확인할수록, ‘자녀들인 인간 우리의 진정한 낙원과 생명과 행복을 위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은 주어진 그대로, 시킨 그대로 순종하며 지킬 때 서로에게 하늘의 참 복이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자 계시가 자식에게 말씀하듯 다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선악과 계명’(창세기2:)으로 시작해서, ‘십계명’(출애굽기20:) 모두가 다 그렇고, 예수 그리스도의 회개하라는 말씀이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태복음22:)는 저 모든 말씀이 죄다 명령형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참 아버지의 명령이나 최고사령관의 명령임의대로가감하거나 거역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가감하거나 거역하면 되레 그 자녀나 그 사병이 불행해지기 마련이니까요.

 


따라서 인간 우리는 스스로 배가 부르거나

교만한 생각이 들 때마다 유태인의 이런 속담을

묵상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네가 없어도 태양은 뜨고 진다.-

 


그렇습니다.

내가 없어도, 네가 없어도, 태양은 뜨고 집니다. 달도 별도 다 뜨고 집니다. 어제처럼 내일도 세상은 돌아갑니다. 한계를 살다가는 티끌같은 인간 우리의 세상 성공이나 소유나 교만보다 더 큰 세계이자 영원한 나라가 있고, 더 소중한 절대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대의(大義) 앞에서 겸손해지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론, ‘빌헤름 텔의 사과에도 역시 그런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텔 자기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아들이지만 그런 아들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있었다는 것. 그럴 것이 아들의 머리에 놓인 그 사과는 조국 스위스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대의(大義)’ 그 자체를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텔은 아들의 죽음조차도 무릅쓰고, 아들의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향해 화살을 힘껏 날립니다. ‘믿음의 조상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절대의(絶大義)’에 순종해서, 자기를 부인하며 어리석은 바보처럼 우직하게 그의 외아들 이삭을 희생양으로 하나님의 제단에 드렸던 그런 마음이자 행함이자 삶이었겠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금단의 선악과 계명을 거역하고 임의대로따먹어버린 인류의 조상아담의 삶과는 다른, 분명하게 구별 내지 성별된 삶이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아들이나 빌헤름 텔의 아들이 불행하게 죽었던가요?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명중했습니다. 대의에 명중했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양'이자 '메시아'로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본래적이고 선재적인 뜻이자 의도이자 마음이자 대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버지들은 물론이고, 그런 아버지에게서 대의(大義) 중심의 삶을 배운 아들들 역시 더 크고 영원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되레 천하 만민에게 복을 주는세상의 생명이자 이자 소금의 삶을 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아브라함)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까지 아니하였은즉 내게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세기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