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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생활이란 하나님이야말로 모든 것이고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일상적인 깨달음,
그분은 모든 것이 향하는 중심이며 우리의 모든
행위가 지향해야 할 중심이라는 깨달음을 통하여,
그분 앞에서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경외하며,
우리의 전 존재는 침묵하는 것이다.
또 우리의 삶과 힘은 그분에게서 나오며,
우리는 살 때나 죽을 때나 온전히 그분께 의존하는 것,
그분은 우리 삶의 노정(路程)을 미리 알고 계시며,
그것은 그분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섭리에 속한
계획인 것을 깨달음을 뜻한다.
나아가 그분 없이 우리 힘으로 우리 끼리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 우리의 모든 계획과 영적인
갈망이 하나님에게서 나와 그분에게서 끝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무의미하다는 것, 결국 단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분의 영광이라는 것을 깨달음을 뜻한다.
··· 주님의 권능으로 우리를 구원해달라고
하나님께 애원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연약함을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분의 자비를 간청하기 위해
우리의 가난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가난을 인식하는 그 일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우리가 미덕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으로 자만하는 것도
매우 잘못된 일이지만, 우리의 약함과 죄를 인식하면서도
무관심한 타성에 빠져있음은 더더욱 잘못된 일이다.
우리의 연약함이나 가난은 하나님께서
갈망의 씨앗을 뿌리는 터전이므로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아무리 타락한 것처럼 보인다 해도, 우리의
끔찍한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사랑하려는 확신에
찬 갈망 그 자체가 바로 그분의 현존(現存)의 징표이며,
우리의 구원의 보장이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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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에 ‘세계보건기구(WHO)’가 발표한,
인간의 ‘건강’에 대한 정의인즉 이렇습니다.
-건강이란 단순히 질병이 없고 허약하지 않은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 정신적
및 사회적으로 완전한 상태를 말한다.-
(Health is a complete state of physical, mental
and social wellbeing and not merely the
absence of disease or infirmity.)
그리고 50년 후인 1998년에 ‘세계보건기구’가 다시
발표한, 인간의 ‘건강’에 대한 정의인즉 이렇습니다.
-건강이란 질병이 없고 허약하지 않은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및 영적(spiritual)
안녕이 역동적이며 완전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까 첨단과학과 진화론 중심의 이성이 고도화된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되레 인간 및 인류의 화두로
부상한 ‘영적’ 의미의 중요성을 세계보건기구도 공식 인정하고
그 언어를 부가해서 명문화시킨 것입니다.
물론 저 ‘영적’ 의미는 기독교에서 의미하는 그런 ‘영성(spirituality)’의 의미와는 다른 포괄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여타 종교 곧 불교, 힌두교, 이슬람 등의 종교에서도 ‘영성’을 강조하면서 ‘종교성’이 곧 ‘영성’이라는 문화적 개념으로 보편화되는 추세가 되었으니까요.
심지어 인문학이나 심리학에서도 ‘영성’이란 용어를 정신적 차원의 ‘내적 에너지’라는 의미에서 주저 없이 사용하고 있을 것을 보면 문화적 개념으로 보편화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성’을 문인 울프(Wolf)는 “인간의 보이지 않는 정수로서 인간 육체에 생기를 주며 지성, 상상력, 감정, 요구, 의지를 포함하는 능력들 중의 하나”라고 정의하였고, 미국의 심리학자 헬미니악(Helminiak) 교수는 “진정한 자기초월을 향하는 본질적인 인간의 역동성을 통합하고자 고귀하고 높고 선한 것을 추구하는 삶의 실재”라고 각각 나름대로 정의했더군요.
그렇듯 ‘영성’에 대한 이해 및 정의도 각각의 종교 또는 학문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그러나 한계를 사는 인간이 ‘보이지 않는 세계’인 ‘영성’의 비밀을 그 누구도 온전하게 정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저는 여기서 문화적 영성이나 심리학적 영성을 운위하고 싶지도 않고, 그럴만한 학문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제가 믿고 의지하며 살아온 체험적 ‘영성’을 언급할 자격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저는 언급 이상으로 ‘증언’할 의무나 책임이나 사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영성’에 관해 좀 상고해보고 싶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spirit)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spirit)과 진리(truth)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4:23-24)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정의하신 저 말씀처럼, 한마디로 “하나님은 영(靈)”이십니다.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실재(實在)이십니다. 따라서 ‘영성(靈性)’은 글자 그대로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의미하고, 그 ‘하나님의 성품’ 내지 ‘그리스도의 마음’ 중심으로 사는 삶이 곧 ‘영성 생활’이 됩니다. 너나없이 태생적 '맹인'인 인생 우리의 '영의 눈'이 제대로 열리고 밝히 열리면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 절로 보이고, 그래서 결국이 허무한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더 크고 영원한 가치이자 소유이자 성취이자 나라인 '천국' 중심의 삶을 절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되레 참 복이 있는 참 '예배'이자 참 '영성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저 ‘예배하는 자’라는 말씀을 ‘영성 생활하는 자’로 바꿔서 묵상하면 영성 생활에 대한 이해가 보다 빠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과 진리로 ‘영성 생활’할지니라.”
저 “영과 진리”는 헬라어 원문에 ”엔(in) 퓌뉘마티 카이 아레데이아“로 되어 있으니까,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지니라“라는 의미가 됩니다. ‘영’ 곧 ‘퓌뉘마’는 ‘바람, 영, 성령’ 등을 의미하는 언어이고, ‘진리’ 곧 ‘아레데이아’는 ‘참, 진리, 진정, 진실함’ 등을 의미하는 언어입니다. 따라서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 ‘영성 생활하라’는 말씀이 되는데, 그럼 보다 구체적으로 ”진리가 무엇이냐?“, 그런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사도 요한이 저술한 ‘요한복음’에서 의미하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세 가지 언급으로 증명되어집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셨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한복음17:16-17)
그러니까 ‘신구약 성경’에 계시된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요한복음1:1)이 참 ‘진리’이자 ‘하나님’이라는 것. 두 번째 언급인즉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8:31-32)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자 ‘가르침’이 곧 ‘진리’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언급인즉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14:6)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말씀’이자 ‘진리’라는 것. 그러니까 ‘진리’는 곧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자 ‘그리스도의 말씀’이자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령’께선 세상의 대단한 이념이나 유식한 사상이나 철학이나 인문학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스스로(自意) 말하지도 않습니다.”(*요한복음16:13-14) “성령께서 시켰다” 운운하며 무당이나 점쟁이처럼 이웃에게 어이없는 무례행각이나 만행을 자행하는 사람들의 그것이 악령이자 미혹의 영으로 분별되어지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바람’ 같은 ‘성령’께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인간 및 인류 구속사(救贖史)가 진행 및 성취되어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마침내 세상에 오신 ‘진리’ 자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대대로 계시 및 예언해주신 구약성경의 ‘말씀’ 자체이자 그 ‘말씀의 성취’이자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요한복음19:30)”고 선언하신 ‘말씀의 완성’ 자체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보이는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참’이자 ‘메시아’ 자체라는 것. 따라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진실로 이해한 자는 그 자체 안에서 절로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되고 또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해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저 말씀도 같은 맥락의 말씀이 됩니다. ‘진리’ 곧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자 ‘부활의 비밀’을 알면 세상의 모든 불안이나 두려움, 증오심, 사심이나 탐욕, 파란곡절이나 생로병사 등 일체의 구속(拘束) 그 모든 것에서 진실로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믿지 못했던 로마 총독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요한복음18:38)고 물었을 뿐 그 해답이나 저 ‘자유’를 끝내 자기 것으로 맛보지도 소유하지도 못했습니다. '섬김의 비밀'도 '섬김의 능력'도 모르는, '권력의지' 내지 자리 내지 포퓰리즘에 연연하는 전형적 '속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해서 그렇게 묻는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침묵'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중앙(배꼽)'인 '골고다 십자가'와 '자기 십자가'라는 인생의 그 참 의미나 가치도 모르고 구원에의 비밀이나 공존의 능력도 모르는, 그래서 되레 실상인즉 유치한 그리고 허무한 '자기 교만'에 안주하거나 그것을 과시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참 은혜도 지혜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것입니다. ‘성령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드려야하고 아울러 그렇게 영성 생활을 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 그런 사람에게 되레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하나님의 나라의 참 자유와 평안과 기쁨과 부활의 생명이 금세에서부터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저도 청년시절에 소위 스스로 “성령 받았다”는 사람이 ‘방언’ 혹은 ‘예언’을 하면서 그 은사로 덕을 세우기는커녕 마치 무당이나 점쟁이처럼 목회자나 평신도는 물론이고 이웃들을 함부로 비판하며 질타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고, 심지어 “성령이 시켰다”면서 자기 남동생을 시켜 모 신앙공동체의 70대 경건한 신앙의 어른을 온몸에 멍이 들도록 구타했던 전직 모 대형교회 ‘여전도사’의 어이없는 만행과 그 추이를 가까이서 지켜본 적도 있습니다.
과연 주님의 말씀 그대로 "그 열매로 그 나무를 압니다." 악령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성령이 악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법입니다. 악령의 하수인이 "자기를 부인하고" 고난의 십자가를 질 수는 없는 법이고, 그 전형이나 아류가 으레 그렇듯 자기 잇속이나 야심이나 탐욕의 늪에 빠져들기 마련이자 십상이니까요.
그럴수록 또한 절감하게 되는 것은, 참 신앙은 인간 우리로서는 당장에 분별하기엔 어려운 ‘영’의 예배만으론 안 된다는 그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초자연적 이적이나 신비 사건을 곳곳에서 증언하고 있지만 그러나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이 없거나 거기서 떠난 ‘신비주의’는 경계하고 있습니다. ‘신비주의’에 빠진 자들일수록 스스로 ‘신’이 되고 ‘교주’가 되어 독선적 만행을 자행하기 십상이니까요. 보이지 않는 ’영‘과 보이는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 되고 인격화 될 때 비로소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있고, 겸손한 영성 생활이 될 수 있는 절대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초대교회 역시 저런 유형의 어둠의 영이나 영지주의(靈知主義)에 의한 미혹이나 오류, 영적 독선과 반목과 어이없는 만행들이 빈발했기에 사도 요한은 이후 노년의 편지에서 또한 “하나님은 빛이시라”(요한일서1:5),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4:8)고 강조하며 이렇게 말씀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한일서4:1-3)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8:12)라고,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13:34)라고, 친히 ‘세상의 빛’이자 ‘세상의 사랑(*아가페)’ 자체이신 정체성을 또한 선언하셨고, 십자가와 부활의 삶으로 그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영’을 알 수 있고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최근에 세상을 떠난 당대의 영성학자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의 이런 말씀을 더욱 유념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영성,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떨쳐버리고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 곧 예수님께 관심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 영성, 즉 우리 영혼에 쏟는 관심은 실제로
예수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께 쏟는 관심이라는
사실이 밝히 드러난다. (*마가복음) 본문은 그러한
인식과 실천을 우리 속에 훈련시킨다. 텍스트 한 줄
한 줄, 한 장 한 장에는 오로지 예수, 예수, 예수밖에 없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의 영성을 위한
내용을 제공할 수는 없다. 영성은 우리에게 주어질
뿐이며,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다.
예외란 있을 수 없다.-
그렇습니다. 참 “영성은 우리에게 주어질 뿐”입니다. ‘단비’처럼, ‘이른 비, 늦은 비’처럼 하늘에서 내려질 뿐입니다. 그래서 죄다 ‘하늘의 은혜’가 됩니다. 그래서 늘 겸손한 신앙인격으로 인도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가 스스로 교만해졌다면 그 ‘은혜’는 '값싼 은혜'이거나 미혹의 영에 의한 '거짓 은혜'입니다.
‘악령’ 내지 ‘세상의 영’도 그 추종자들에게 “천하만국과 그 영광”(마태복음4:8)을 주는 등 나름대로 세상의 화려한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적 실재이니까요. 그러나 그 열매는 늘 악하도록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그것들이었고, 그 결국은 늘 허무한 음부이자 구렁텅이였습니다.
진정한 ‘영성 생활’은 곧 그리스도의 마음과 삶을 나날이 본받아 나날이 닮아가는 ‘제자의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의 용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누군가를 용서하는 삶이고, ‘그리스도의 사랑’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너무 늦기 전에 충심으로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받은 그 용서 그 사랑 그 은혜 그 구원의 ‘빚’을 이웃 누군가에게 대신 갚아야 할 필연의 의무도 거기 있습니다. 오늘 만나는 '몹시 미운 사람'을 그리고 지금 여기서 만나고 있는 '지극히 작은 자'를 다 "주님께 하듯" 공손하게 대하며, "선한 말, 선한 일"(데살로니가후서2:7)에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할 필연의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오늘의 모든 삶 자체가 '영성 생활'이자 '영성 인격'이 되어야한다는 것. 그럴 것이 오늘 '옷깃을 스치며' 오가는 인연조차도 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섭리이니까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계시된 그 분의 뜻 그 분의 진리에 세상 범사를 맡길 수 있는 삶, '원수'에 대한 심판조차도 맡길 수 있는 삶, 그것이 과연 진짜 실력이자 진짜 능력입니다. 그것이 과연 영원한 삶으로 인도하는 영성의 지혜이자 진짜 지혜입니다. 세상 권력이나 재물이나 지성이나 이념을 믿고 거기 맡기는 삶보다 더 위대한 실력이자 능력이고, 더 유식한 지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진솔한 ‘그리스도의 용서’나 이타적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전 시 타인 누군가에게 한 번도 베풀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남은 건 하나님 앞에서 “심은 대로 거두는”, ‘긍휼이 없는 심판’뿐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주목 및 명심할 것은, 사도 바울이 한마디로 갈파한 '천국에 대한 정의'(*로마서14:17)가 그런 것처럼 '그리스도의 용서'나 '그리스도의 사랑' 그 선재적 은혜와 긍휼을 맛보아 알고 그것을 이웃에게 베풀 줄 아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에겐 세상 모든 환난과 우여곡절을 "넉넉한 이기는"(로마서8:37), '십자가' 그 저주의 죽음조차도 넉넉히 이기는 '그리스도의 기쁨'과 '그리스도의 평안'이 또한 절로 주어진다는 그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 및 그리스도와 '의로운 신뢰관계'에 있는 '참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하고 영원한 '평안'이자 '기쁨'입니다.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참 복이자 참 생명이자 부활 생명이라는 것. 예나 지금이나 '성령'을 통해 현재적으로 주어지는 신령한 복이자 능력이자 영원한 자산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성령’과 ‘보이는 진리’ 안에서 사도 바울처럼 늘 올바른 ‘영적 예배’를 드리고 올바른 ‘영성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덕과 사랑을 본받아 그것을 하나라도 더 실천하는 성숙한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할 절대 이유 역시 거기 있을 것입니다. 이 세대나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참 복이 있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자 미래는 과연, 되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거기서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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