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멜의 영성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으면서

이형선 2020. 2. 10.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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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게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과 기근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신약성경 마태복음2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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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유식한 좌우 이념 및 진영 논쟁이나 대립,

정치판의 입씨름도 많고, ‘돈 우선, 경제 우선(First)’ 타령만

하는 세상에, “그 주둥이 닥치라!”는 하늘의 지엄한 분부를

듣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들을 귀없는, 완악하고 교만한

인생들에게 그래서 신종전염병이라는 재앙을 허락해서

그 입들을 죄다 마스크로 덮어버리신 것은 아닐까요?

 

목하 중국에서 발원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감염 괴질로 인해 지구촌 전체가 초긴장 상태의 비상에

걸렸습니다. 나라가 나라를 경계하고, 인간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마스크행렬들. 가면을 쓴 얼굴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토로처럼 목하 중국은 감염병과

인민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중국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도 다를 바 없습니다. 죽음으로 인도하는 전염병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사람은 이나 경제만으로 사는 동물이 아닙니다.

전염병과 인민 전쟁이 벌어지면 국내경제도, 국제경제도

침체를 넘어 온통 뒤죽박죽되어지기 마련이니까요.

정체 모를 일개 신종전염병 앞에서 인민 전쟁하며

몸을 사리고 두려워 떠는 인간들이, 왜 정작 역사와 운명의

주체이신 살아계신 하나님두려워할 줄은 모르는 것일까요?

문제가 차라리 이상하고, 괴이하기까지 합니다.

과연 사욕이나 교만에 빠질수록 되레 어리석음을 자초하는

것이 인간의 타락한 성정이자 그 성향 및 추이입니다.

 

스스로 무신론자나 불신론자라고 공언하는 것은,

이성이나 유물론이나 돈 혹은 경제만을 강조하는 것은,

막말로 스스로 동물의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공언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약육강식의 동물처럼 먹고

먹히며 살다 죽는 가치관의 삶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일까요?

동물화 된, 물질화 된, 인간 사회에서 인간의 진정한 가치나

존엄성이나 인간애가 생성될 수 있는 것일까요?

 

14세기 유럽 전체 인구의 거의 절반을 떼죽음으로 인도했던

전염병 페스트(흑사병)’. 유럽 최악의 대재앙페스트라는

절망적 시대운명과 부조리에 맞서 사투하던 시민들의 실존적

인간애를, 20세기 무대로 끌어와 재조명했던 작가 알베르 까뮈의

소설 페스트 이런 언급이 나옵니다.

 

-그렇게 페스트가 일부 사람들에게 수행해야 할 의무가

 되자, 페스트는 마침내 실체를 드러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의 문제가 된 것이다.-

 

그렇습니다. ‘페스트, 아니 신종 바이러스가 목하 모든 사람의 문제가 된 것입니다.” 실존적 구원의 문제가 된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 문제를 참 문제로 치명적이도록 절실하게, 심각하게, 깨달으라는 것이 저런 재앙을 허락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허무하도록 무력하게 떼죽음 당하는 인간들의 죽음 앞에서 그것이 모든 사람의 문제인 것까지는 인식했던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였던 까뮈도 그것에의 진정한 구원의 해법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 자신도 교통사고로 한순간에 생을 허무하게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페스트에 허무하게 죽은 자와 조금 더 살다가 그 후 교통사고로 허무하게 죽은 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실존적 죽음 앞에서, 굳이 다른 차이나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문제는 오직 하나로 귀결됩니다. 허무한 죽음에서의 진정한 구원의 해법, 그것만이 인생의 진정한 문제로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선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라고 시대의 징조 내지 말세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그럴수록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태복음24:42)라고 미리 예언 및 강조하셨습니다.

의인 노아가 홍수 심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듣고, 세상의 온갖 야유와 비웃음을 감수하면서 주신 말씀 그대로 120년에 걸쳐 구원의 방주를 지은 것처럼, 그렇게 깨어 있어세상과 구별된 성숙한 '구원의 신앙인격'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다운 그리스도 인격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장성한(the fullness of Christ) 분량'(*에베소서4:13)에 이르는 신앙인격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유감스럽게도 '성숙한 그리스도 인격'보다는 외형이자 외식인 '대형'과 '다수'를 지으며, 키우고, '자기교회' 중심의 그것을 서로 자랑했습니다. 하향평준화된 '기복 타령, 축복 타령'에 안주해서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 내지 이 사회에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 및 구현하기 위한 이타적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되레 걸핏하면 야유 당하는 사회적 우려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독실한(?) '장로 대통령'이라는 사람조차도 이기적인 '거짓말'과 '돈타령을 일삼는 탐욕의 화신'이 되어 감옥에 들어가는 모습을 우리는 지켜봐야 했습니다. 과연 주님의 말씀 그대로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주어진 기존의 기회와 풍요의 때를 잃어버리자 이른바 무신론적 '의식화된 종북 주사파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지금, 한국교회는 저들보다 '성숙한 그리스도 인격'을 제자로 키워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법조계 언론계 등에 보내지 못한 그것을 먼저 깊이, 충심으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비판과 폄하의 문제는 박해나 원인적 현상이 아니고 응분의 결과적 현상이기에, 좌우 이분법적 대결로 인도하는 정치적 프레임이나 그런 선동이나 시위를 일삼는다고 해서 위상이 변화될 리는 없을 터이니까요. 그럴 것이 미래세대인 요즘의 청년들 곧 밀레니엄세대는 기성세대인 우리보다 현실감각이나 합리적 비판의식이 되레 더 뛰어나니까요.


'성공한' 다윗 왕도 말년에 인간 자기의 정치력 및 군사력을 내외에 과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무려 '아홉 달 스무 날' 동안에 걸쳐 병적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당대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130만 명"(*사무엘하24:)이었습니다. 실로 대단한 시위입니다. 중세기 '십자군'처럼 막강한 세력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 내지 '경건의 능력'보다 동원할 수 있는 '다수의 군사력'을 더 믿고 의지했던 최고지도자의 그런 행태 그런 시범이 '큰 죄'임을 뒤늦게 깨달은 다윗 왕은 "심히 미련했던" 자기 행각을 깊이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에게 '선지자 갓'을 통해 응분의 징벌을 선언하십니다. 예언 그대로 이스라엘 전국에 '전염병'이 창궐하고 그래서 '칠만 명'이라는 백성이 순식간에 죽고 맙니다. '다수의 군사력'이라는 과시나 그 정치적 실력행사에 대한 믿음이나 자만은 결과론적으로, 실로, 허무한 것이다는 하나님의 역설이 되겠지요.           


각설하고, 저 난리와 난리의 소문(wars and rumors of wars)’이라는 난리곧 헬라어 폴레모스는 각종 난리, 싸움, 전쟁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국제적 무력 전쟁이나 경제 전쟁이나 전염병과의 전쟁, 기상 이변이나 지진이나 기근, 정치적 좌우파 싸움 등이 죄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선 그런 시대적 내지 종말적 징조들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다"(마태복음24:6)라고 친히 예언하셨습니다. 아울러 '끝' 곧 '종말'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24:36)고 단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그 날과 그 때'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절대이유, 곧 '미혹의 영'에 사로잡혀 스스로 그리스도처럼 아니 그리스도보다 더 신령한(?) 목자나 교주처럼 행세하며, '직통계시' 운운하며, 혹세무민하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나 그런 이단적 아류의 교설에 세뇌 되어선 안 될 절대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시대적으로 '난리'나 '재앙'이나 '말세의 고통'은 늘 있지만 그것이 또한 '끝'은 늘 아니니까요. 그것은 이 세상 삶의 현장에서, 사명의 현장에서, 더욱 "깨어 있으라"는 징조이니까요.

고인이 되신 영성학자 유진 피터슨의 사역(私譯)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이것은 앞으로 닥칠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24:6)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저도 어느 날 신종 전염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고, 교통사고로 한순간에 죽을 수도 있고, 암 질환에 걸려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성자 성녀라 해도 그렇게 죽을 수도 있습니다. 13세기 '성자 프렌치스코'도 모진 병고를 앓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되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대속의 고통인 오상의 신비 곧 두 손과 두 발과 옆구리에 신비한 성흔의 은총을 체험하고, 기뻐하며 선종했습니다. '겉사람'은 후패 되었지만 '속사람'은 그토록 성숙한 심령, 청결한 심령이 되어 하늘나라로 이사를 간 것입니다.     


과연 현세의 죽음이 또 다른 하늘나라에서의 삶의 시작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으면, 죽음이나 순교조차도 절망의 대수는 아닙니다. 두려움의 대수도, 불행의 대수도 아닙니다. 진정한 신앙인격은 이론이나 학문이 아닌 체험에서 비롯됩니다. 저 역시 사도 바울이 체험했던 셋째하늘’(고린도후서12:2)의 신비를 포함한 이 광대한 우주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인 인생의 삶이 이 지구촌에서 죄다 끝난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하늘나라가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따라서 그럴수록 인생의 절대 숙제는 세상에서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부활 생명'(*요한복음11:25-26) 그 진정한 구원의 해법을 알고, 문제를 참 문제로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 있는 삶이 절대 중요하다는 그것입니다. 봄이 되면, 때가 오면, 생명이 있는 나무나 식물들이 부활하듯 그렇게 인간의 부활 생명그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자 비밀을 초월적으로 믿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유식한 불가지론자들은 '초월적' 내지 '초자연적' 창조 비밀이나 생명의 신비를 부정하며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계를 살다 가는 피차 피조물인 동물이나 식물 차원의 '인간의 형상'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초월적 세계를 믿을 수 있습니다. 직접 체험으로든 간접 체험으로든 그것이 믿어집니다. 수동태입니다. '내 안에' 초월적 '하나님의 영'이 계시기에, 초월적 '하나님의 나라와 그 세계'가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해서 그 자체가 바로 지고한 '하나님의 은혜'이자 '하늘의 참 복'입니다.        

 

중국연구진을 위시한 학계연구진의 발표에 의하면, 목하 세상을 위협하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자연숙주(宿主)박쥐에서 발원하여 중간숙주인 천산갑을 통해 인간에게 전염되었을 가능성이 ‘99%’라고 했더군요. 고급식재료로 거래되는 천산갑은 특히 그 등의 비늘이 정력에 좋다는 입소문을 타고 고가에 밀거래되고 그래서 멸종위기상태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과연 인간의 정욕이나 탐욕으로 인해 피차 피조물인 인간과 동물과의 공존 관계, 자연과 인간과의 공생 관계나 그 생태 횐경이 파괴되면 될수록 신종 전염병도 더욱 발생 및 창궐하게 되는 것인가 봅니다. 그것이 과학 및 의학적으로도 증명되는 하나님의 창조 비밀이자 법칙이자 생명체상호역학관계의 자연발생적 메커니즘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대적 내지 실존적으로 늘 임하는 말세의 고통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수록, 인간이 인간을 서로 경계하고 죽이게 하는 '전염병' 같은 이기주의나 물질주의 또는 '경건의 모양'을 팔아서 분열과 대립과 반목을 일삼는 '정치적 프레임' 같은 그런 세속의 미혹이나 가치관에서 네가 돌아서라는, 구별된 영적 가치관을 가진 신앙인격이 되어 더욱 깨어 있어야 할진정한 구원에의 당위성을 사도 바울 역시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디모데후서3:)

 


 (*추신 : ‘종간 인사를 드린 후,

  만 일 년 만에 다시 이 글을 올리게 됩니다.

  홍수가 나도록 유식한 말도 많고 글도 많은 세상인데,

  저로썬 내 분수 알고 그만 퇴장해서 조용히 살자 싶었습니다.

  헌데 제 심령에 거룩한 부담이 되는 울림이 계속되고,

  ()의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이 먼저 구할 제 몫의

  분수에 대한 참 앎이자 사명이다 싶은 자각이 있어서

  간간이나마 묵상의 글을 한편씩 올리며 이 영성 편지

  사역을 계속해 나가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