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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떤 종교가 인간 우리의 선,
우리의 의무, 우리를 배반하게 하는 연약성과
그 원인, 그것을 고칠 수 있는 방법과 그 방법을
실현하는 길 등을 우리에게 가르쳐줄 것인가?
다른 모든 종교는 그것을 하지 못했다.
신의 지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기로 하자.
신의 지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에게서는 진리도 위로도 기대할 수 없다.
나는 너희들을 창조한 자로서, 나만이 너희들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너희는
내가 너희를 만들 때의 상태대로 있지 않다.
나는 인간을 깨끗하고 죄 없이 완전하게 만들었다.
너희에게 빛과 이지도 주었다.
그리고 나의 영광과 경이도 주었다. 그때에 인간은
하나님의 위엄을 볼 수 있었다.
‧‧‧ 죽음과 불행을 알지도 못했다.
그러나 인간은 그처럼 위대한 영광 속에서
교만해지고 말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자기중심으로
삼아 나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래서 내 지배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 속에서 행복을 찾음으로서
나와 동동해지고자 했으므로 나는 그를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그에게 복종하던 모든 피조물들로 하여금
그에게 반항하게 하고, 그의 적이 되도록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이제 인간은 짐승과 비슷해졌고,
내게서 멀리 떠났으므로, 이제 그에게는 한 가닥
희미한 나의 빛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파스칼(Blaise Pascal)-
▣
‘고난주간’이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구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온통
‘전쟁’하는 와중인지라 ‘고난주간’의 의미가 더욱 절실해집니다.
‘인공(AI)인간’까지 만들어 스스로 창조주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세하던 첨단 21세기 문명의 ‘교만한’ 인간들.
그런 과학이나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던 돈, 재물” 같은 경제 등
세상의 기존 우위 가치들이 ‘카오스(chaos)’ 같은 ‘혼돈’의 늪에
빠져 죄다 허우적거리는, 차라리 무력한 인류의 세태를 절감하면
할수록 이 고난 이 재난 속에는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주 하나님의 영적(靈的) 메시지가 또한 분명히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오늘의 우리 인간 및 인류에게 주는
‘영적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시니라.-(마태복음16:2~4)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고난이나 시대의 재앙에 대한 분명한 해답이자 유일한 해법은 오직 ‘요나의 표적’, 그것입니다. 그럼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역시 ‘말씀으로 말씀을 풀어봅시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마태복음12:39~41)
이기적이도록 편협한 국수주의 내지 배타적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구약시대 이스라엘 선지자 요나. 그는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및 간섭에 의해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갇혀 있다가” 되살아난 후 당시 ‘악하고 음란한 세대’였던 이방민족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전도 및 선포했고, 그들이 충심으로 회개함으로서 ‘멸망’이라는 심판을 면하고 구원에 이르게 했던 ‘하나님의 종’입니다.
따라서 ‘요나의 표적’은 곧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구원하기 위한 ‘희생양’이 되어, 저주의 십자가 그 ‘대속(代贖)의 죽음’을 당한 후 “밤낮 사흘 동안 무덤 속에 있다가” 부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을 의미합니다. 구약에 나타난 ‘요나의 표적’ 그 계시이자 예표를 “다 이루는(完成)” 최종적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요나보다 더 큰 이’인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은 초월적 신령한 ‘부활과 승천’을 통해 종말론적으로 성취 및 증명되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해보고 싶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단 및 선포하신 저 ‘인간의 정체성’이자 우리 ‘세대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입니다. 인간 우리는 평생 경찰서나 교도소는 모른 채 나름대로 선하고 의롭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너와 나를 막론하고,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왜 “회개가 절대 필요한 죄인(罪人)인가?”, 왜 “회개가 절대 필요한 악하고 음란한 세대”인가?
저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음란한’ 곧 헬라어 ‘모이칼리스’는 ‘성적 간음을 하는’ 그런 음란을 의미합니다만, 아울러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영적 간음을 하는’ 그런 음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적 쾌락이나 돈이나 정치적 이념이나 권력이나 명예 등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그 모든 것이 ‘음란한 상태’입니다. 심지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노년에 얻은 자기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그 자체가 영적으로 ‘음란한 상태’가 되어 시험거리가 됩니다.(*창세기22:2) 예지적 또는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그 아들을 타락한 세상 오욕 중심의 길이자 허무한 죽음의 길로 인도하는 ‘악하고 음란한 행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 입맛에 맞든 안 맞든 내가 ‘악하고 음란한 죄인’이라는 것, 우리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것을 뼈저리도록 절감한 자만이 비로소 ‘메시아’ 곧 ‘그리스도’를 갈구하게 됩니다. 내가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을 통감한 자만이 ‘대속의 구원자’를 치열하게 갈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스스로 건강하다고 자부하는 자는 ‘의사’나 ‘병원’을 찾지 않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자, ‘율법적 의인’ 내지 ‘실정법적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자는 ‘대속(代贖)의 구원자’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태복음9:12~13)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 대표적 사례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립보서3:)라고 자부했던 사울. 그는 실로 당대의 ‘율법적 의인’이자 ‘바리새인’이자 대단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미천한 나사렛 출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도 않았고, 부활 승천했다는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되레 죄다 잡아 죽이는데 앞장섰던 열혈청년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다메섹 도상에서 여전히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신비를 체험한 후, 비로소 율법이나 학문 이상의 안목인 영안(靈眼)이 열려지면서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는 것을 절감하고 이후 역설적으로 회개에 합당한 헌신의 길을 가는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모데전서1:15)
그럼 여기서, 저 ‘팡세’에서 발췌한 ‘파스칼’의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서술인 ‘신의 지혜’에 다시 주목해 봅시다.
먼저 타락하기 전의 상태에 대한 서술입니다.
-인간에게서는 진리도 위로도 기대할 수 없다.
나는 너희들을 창조한 자로서, 나만이 너희들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너희는
내가 너희를 만들 때의 상태대로 있지 않다.
나는 인간을 깨끗하고 죄 없이 완전하게 만들었다.
너희에게 빛과 이지도 주었다.
그리고 나의 영광과 경이도 주었다. 그때에 인간은
하나님의 위엄을 볼 수 있었다.
‧‧‧ 죽음과 불행을 알지도 못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피조물인 인간은 그렇게 ‘에덴’ 곧 ‘낙원’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오늘의 ‘십계명’처럼 하나님이 인간 아담 내외에게 주신 ‘유일한 계명’은 있었습니다. 그 ‘금기의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2:16~17)
그렇습니다. ‘선악의 절대 기준’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절대 선’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마가복음10:18)라고 단언하셨습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는 의미의 말씀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아담 내외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것”(창세기3:4~5)이라는 ‘뱀’ 곧 ‘악령’의 미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어버립니다.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의 기준이자 주체가 되고자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타락으로 인도한 가장 무서운 미혹이자 ‘교만’입니다.
그 타락과 불순종의 결과로 아담 내외는 하나님처럼 되기는커녕 외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실낙원(失樂園)’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위엄을 볼 수 없게 되고, 죽음과 불행의 길을 가는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저 사건이 ‘창세기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도 하나님이 성령과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로 주신 말씀 곧 ‘십계명’을 위시한 ‘성경 말씀’을 따먹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 스스로 선악의 주체가 된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과 그 영적 관계가 단절이 되고 결국엔 죽음과 불행의 길을 가게 되기 마련이니까요.
개개인이나 이단적 종파의 교주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저명한 목사나 신학자들조차도 나름대로 성공하면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어 성경 말씀을 임의대로 따먹거나 자기 입맛대로 가감(加減) 및 취사선택하고, 그래서 자기가 선악의 기준이 되고 주체가 되어 교주처럼 행세하는 자들이 적지 않던데, 그런 ‘교만한 사람들’의 결국은 하나 같이 허무한 죽음과 불행의 길을 가게 됩니다.
무신론자들이자 유물론자들에 의한 ‘인류 최대의 실험’이었던 구소련 공산주의 실험도 역시 그렇게 ‘죽음과 불행의 길’을 갔습니다. 인간 개개인도 공동체도 국가정치시스템도 스스로 선악의 주체가 되면 그 ‘교만’ 때문에 결국엔 자기들이 불행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절대선이신 창조주 하나님 한 분’ 앞에서, 그분이 계시해주신 성경 말씀 앞에서, ‘절대 겸손’해야 할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성경이 가는 대로 가고 멎는 데서 멎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시 파스칼의 서술로 돌아가 상고해봅시다.
-그러나 인간은 그처럼 위대한 영광 속에서
교만해지고 말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자기중심으로
삼아 나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래서 내 지배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 속에서 행복을 찾음으로서
나와 동동해지고자 했으므로 나는 그를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그에게 복종하던 모든 피조물들로 하여금
그에게 반항하게 하고, 그의 적이 되도록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이제 인간은 짐승과 비슷해졌고,
내게서 멀리 떠났으므로, 이제 그에게는 한 가닥
희미한 나의 빛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과연 인간은 그렇게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어,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이자 주체가 되고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 ‘내 원, 내 뜻’ 중심으로 살려다가 되레 그 불순종 그 타락으로 인해 ‘영(靈)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짐승과 비슷해진”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아담을 위시한 인간 우리 모두의 정체성입니다.
그래서 고난과 죽음에의 길을 가는 불행하도록 허무한(Meaningless) 삶이 우리의 운명이자 숙명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분명 ‘비본래적(非本來的)인 상태’입니다. ‘회개하고’ 곧 ‘방향을 돌려서’, ‘본래적인 상태’로 돌아가야만, '속사람'이 진실로 변화되어야만, ‘짐승’ 내지 ‘동물’과 다른 진실로 가치 있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시대’를 사는 오늘의 스스로 유식해지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된 인간들은 ‘선지자 모세’가 기록한, ‘성경 창세기 1~3장’에 기록된 ‘창조론'이나 '인간의 타락과 실낙원'에 관한 말씀을 ‘신화'나 ‘허구’로 취급하며 부정 및 불신합니다. 이른바 과학적이라는 ‘진화론’을 되레 더 믿습니다. 저들은 ‘빅뱅 우주론’을 운위하며 ‘우주의 나이는 136억년’이고, ‘지구의 나이는 46억년‘이라고 주창합니다.
’천년‘도 살아보지 못한 인생들이 ’억년‘ 운운하는 계산 그 자체부터가 ‘학문적 이론‘이자 ’가설(假說)‘일 수밖에 없을 터이지만, 그런 학문에 문외한인 저로서 가타부타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통신학계‘ 안에서도 ‘유신진화론’을 주창하기도 하고, ‘창세기 1장’에 기록된 ‘6일 창조’의 사건을 문학적 내지 비유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고, 문자적이자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니까요.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종’이자 ‘선지자인 모세’는 우주나 지구나 인간의 생성을 생물학이나 고고학 같은 과학적 탐구 차원에서 ‘창세기’를 기록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그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복이 있는 인간’이 그 형상 그 영성 그 본래성을 잃어버리고 ‘타락한 죄인’이 된 ‘인간의 정체성’ 그 기원을 ‘하나님의 영(聖靈)의 지혜’를 받아, 문학적 또는 문자적 방법으로 기술했다는 그 자체가 정작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선지자’에게 찾아가서 ‘생물학’이나 ‘고고학’을 묻고 구하는 건 그 자체가 어리석은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철학자’에게 찾아가서 ‘법학’이나 ‘의학’을 묻고 구하는 건 그 자체가 미련한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파스칼은 ‘창세기’에서 '말씀 그 자체의 비밀'이자 ‘신의 지혜’ 그 핵심을 제대로, 온전히, 이해 및 체득했던 큰 학자이자 사상가다 싶습니다. 따라서 ‘창세기’를 위시한 성경의 초자연적 사건들을 ‘비신화화(非神話化)’ 운운하며 '양식사'적 비평을 일삼는 자유주의신학이나 그런 사조나 인문학적 접근을 경계하고, ‘선악과’를 성(性)관계로 해석하며 스스로 크게 깨달은 의인인 체 행세하는 그런 이단적 아류의 미혹이나 독선적 오류에 빠지는 것도 경계하고, 스스로 ‘죄인' 또는 ‘짐승’으로 비하된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 그 올바른 이해와 인식 자체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또한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과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그것이다.-
인간 우리의 성정이 태생적 ‘죄인’임을 자각할 때, 철저하게 이기적이자 자기중심적이자 욕구적인 우리의 "이 모든 악한"(*마가복음7:23) 성정과 체질을 절감할 때, 응분의 심판이자 형벌인 고난과 죽음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구약 '레위기'의 제사법에서 무수히 강조하고 있는 ‘희생양’이라는 속죄(贖罪)를 위한 응분의 ‘대속물'은 그것이 양이든 염소든 소든 죄다 '하나님의 정의'의 집행을 의미합니다. 인간 '나의 죽음'을 대신하는 대속의 죽음이 필요하고, 궁극적으로 '대속의 희생양' 곧 '메시아'가 절로 필요하게 돼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약과 신약성경에 집요하게 그리고 여일하게 언약 및 증언되어 있는 '복음'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7:24), 그렇게 인간 자기의 정체성을 크게 깨달은 ‘병자’만이 ‘의사’의 필요나 진가를 제대로, 온전히, 알 수 있다는 의미에 다름 아닙니다. 태생적으로 '사망의 몸' 곧 '전적 타락'으로 참 영혼이 죽은 자 내지 죽은 시체가 자기 노력이나 수행을 통해 진실로 선해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참 생명을 잃어버린 그래서 '짐승과 비슷해진' 그래서 철저하게 '이기적인 동물'이 자기 의지로 '공동선'이라는 이타적 내지 헌신적인 그 어떤 일을 그 얼마나 진실하게 그리고 가치있게 행할 수 있을까요. 인간 우리의 모든 이중적 위선이나 실존적 모순이나 부조리 등이 죄다 거기서 비롯되는 것 아닙니까?
그 해법은 과연 인간 자기의 고상한(?) 수행이나 고행이나 철학적 탐구에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유태종교적 율법이나 바리새인적 그 준수나 노력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인간 자기의 노력에 대한 한계 곧 "오호라"라는 '자기 절망'이자 큰 깨달음이 되레 '복음'으로 인도하는 진솔한 명제이자 화두가 됩니다. '(메시아)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는 절대 유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과연 큰 깨달음이 큰 겸손, 큰 믿음, 큰 구원, 큰 지혜로 인도합니다. 사람은 ‘떡’만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성욕’만으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권력이나 재물이나 명예욕만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그것에 대한 의지만으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물질적 내지 육욕적 내지 일차원적 욕구를 넘어 보다 높은 차원의 이상과 비전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천국)"와 그 말씀과 그 지혜를 추구하는 심령적 비전 내지 정신적 가치 말입니다. 진실한 정의도, 사랑도, 섬김도, 안식이나 참 행복도, 이웃과의 공존도, 오직 거기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인간 및 인류의 숙제이자 숙원인, '저주의 십자가'에서의 고통과 죽음조차도 능히 이기는 ‘부활’에의 소망도 거기서 비롯됩니다. 그것은 ‘인류의 조상’으로 표현되는 ‘아담’이 잃어버린 ‘에덴’ 곧 ‘낙원’이자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의미하니까요. '낙원'이라는 참 행복을 잃어버린 오늘의 불행한 개개인도, 가정도, 공동체도, 사회도, 민족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 '낙원' 내지 '천국'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영성의 비밀이 거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그 구원이자 회복의 사역을 " 다 이루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래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마가복음10:45)이라고 친히 언급하셨습니다.
목하 우리의 일상이나 사회 및 국가 시스템을 온통 불안과 혼돈과 공포 속으로 인도하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도, 저 파스칼의 언급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짐승과 비슷한 존재’가 돼 갈수록 “그때까지 그에게 복종하던 모든 피조물들로 하여금 그에게 반항하게 하고, 그의 적이 되도록 만들어버린” 하나님의 창조 섭리이자 자연의 섭리일 수 있을 것입니다. ‘박쥐’라는 숙주를 통해, ‘천산갑’이라는 숙주를 통해 살았던 ‘바이러스’ 저 모든 것들이 이젠 인간에게 직접 ‘반항’하는 ‘대적’이 되어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일개 신종 전염병 앞에서 너나없이 불안에 휩싸여 전전긍긍하는 별것도 아닌 우리네 인생들. 패권을 자랑하며 행세하던 제국이나 선진국들의 그 권세나 경제조차도 휘청거리는 이 ‘시대의 징조’ 앞에서, 우리는 목하 이웃이 병들면 나도 병들고, 이웃국가가 병들면 우리나라도 병들고, 자연 생태가 병들면 인간도 병들어 죽는다는 하늘의 계시적 메시지를 생생하게 체험 및 절감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겸손하게, 자연 생태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며" 공존하지 않으면 공멸한다는 것. 너도 나도 죽음과 불행의 길을 간다는 것. 인간 우리가 ‘저주의 십자가’라는 형극의 죽음 문제조차도 겸손하게 ‘절대선’이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에 맡겨야 할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26:39)
인간 내가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주장하면, 인간 ‘내 원, 내 뜻, 내 이념, 내 학문, 내 선행, 내 수행, 내 노력’이 주체가 되면, 결국엔 나도 너도 교만에 빠지고 그래서 피차 불행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이 허무한 일개 '피조물'인 인간 자기의 이성을 고집하면 고집할수록 그 자기 한계에 갇혀, '창조주' 하나님의 '기묘'나 '기적'을 체험할 기회이자 구원의 기회를 되레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계시된 성경 말씀의, 말씀에 의한, 말씀을 위한, '하나님의 원,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온전한 신뢰와 맡김 거기서 참 구원의 길이 열려지기 때문입니다.
과연 처참한 ‘죽음의 잔’까지도 그렇게 감수 및 감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사는 ‘부활의 생명’이자 그 말씀과 그 초월적 신비는 마침내 세상에서 성취되고 증언되고 선포되었습니다. 선포된 그 '복음', 진실로 '복된 소식' 그 자체가 곧 '케리그마'입니다.
모든 사도들이 죄다 처참하게 순교 당하면서까지 담대하게 증언했던 저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성경의 기록이 다만 ‘종교 사기꾼들’의 기록일까요? 바른 영성은 영성과 통하고, 선한 양심은 양심과 통하는 법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또한 믿어진다는 것입니다.(*요한복음8;47) "합력해서 선이 이루어지고", 사역도 증언도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의 십자가 죽음까지는 믿을 수 있어도, 부활은 믿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많더군요. 그러나 이성(理性)과 신앙(信仰)은 거기서 갈립니다. 이성을 초월하지 못하는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니고, 참 영성도 아닙니다. 참 신앙은 오직 ‘나와 영(靈)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이자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어도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을 버려둠을 당하는”(*마태복음24:41), 그런 ‘일대 일의 인격적 관계’입니다. 철학자 키엘케고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 앞에 선 단독자 관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인이나 교회가 너무 세속화되었다”는 등의 비판이 없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알게 모르게 '선한 교인'도 '선한 교회'도 많이 있습니다. '3%의 소금'이 있기에 여전히 '바다'도 '세상'도 살아있다는 것. '3%'는 '1%'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수치입니다. 성경의 진수도 잘 모르면서 악의적 폄하를 일삼는 무리나 그런 풍조에 휩쓸려 하나님과 그리스도 자체를 부정하며 믿지 않는다는 함정이나 미혹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벼룩들'이 밉다고 '초간삼간' 태워버리듯 ‘성경 말씀’이나 그 '복음' 그 ‘지혜’를 태워버리면, 임의적으로 가감하거나 다원주의적으로 혼합한 '다른 복음'을 믿거나 전하면, 결국엔 자기가 불행해지니까요.(*갈라디아서1:8)
아무쪼록 성경에서, 생로병사의 길을 가는 허무한 인간 우리의 세상 모든 우여곡절을 능히 이기는 ‘영원한 부활 생명’에의 길과 그 영적 코드를 읽어내고, '대속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의 심오한 비밀이자 초월적 삶의 비밀인 그 ‘천국의 비밀’을 ‘내 것’으로 확실하게 소유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린도전서15: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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