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멜의 영성

'너희의 미래와 희망'을 위한 '오늘의 재앙'

이형선 2020. 3. 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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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구약성경 예레미야(29: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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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망국의 길을 가는 가장 암울했던 시대에 사역했던

비운의 선지자이자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솔로몬 왕의 아들인 르호보암 왕 시대에 남 유다

북 이스라엘로 분단되었던 왕국은 북 이스라엘

아시리아 제국에 짓밟혀 먼저 멸망을 당합니다.

B.C. 722년이었습니다.

 

형제국가인 북 왕국이 처참하게 멸망당했으면, ‘살아계신 하나님보다 이방의 우상들이나 그 세속의 가치들을 더 섬기면서 패역하고 완악한 생활을 일삼다가 마침내 멸망당했으면, 그 아픔과 치욕을 반면교사삼아 더욱 깨어 있어야 했을 터인데 그 밥에 그 나물이었던 남 유다 왕국역시 내분과 패역을 일삼다가 136년 후인 B.C. 586년에 바벨론제국에 의해 최종적으로 멸망당하고 맙니다. 그 난리와 어둠의 시대에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아 활동했던 선지자가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물론 당대에도 언필칭 하나님의 이름내지 경건의 모양을 팔아서 자칭 선지자행세를 하며 군림하던 무리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짓선지자들인 저들은 왕이나 백성들의 입맛에 맡는 자의적 내지 인위적인 거짓평안과 거짓축복을 헤프게 발설하며, 참 말씀을 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되레 핍박하고 시기하며 모함했습니다.

 

거짓선지자들이 주도 및 득세한 여론에 의해 당대 민심의 향방은 반 바벨론, 친 애굽의 기류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국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바벨론 포로생활을 예언합니다. 반역자나 매국노 같은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를 주관 및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참 뜻이자 참 말씀이었기에, 예레미야는 대적들의 모진 핍박과 박해를 감수하면서 말씀을 선포하다가 저들에 의해 강제로 애굽으로 끌려가 마침내 거기서 순교까지 당합니다.

 

상기(上記)된 저 말씀은, 그런 선지자 예레미야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말씀하신”(예레미야29:4) 것을 대필한 편지에 나오는 말씀 중 일부입니다.

싫어도, 고역이어도, ‘바벨론 70년 포로생활이 하나님의 뜻이니 거기에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며 ‧‧‧ 자녀를 낳으며 ‧‧‧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며거기 순응 및 정착해서, 여유를 가지고 그것조차도 감사하며 평안하게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남으라는 것입니다.

하루가 천년 같이, 천년이 하루 같이역사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자 구속사를 굳게 믿고, 늘 깨어 기도하며, 오래 참으며, ‘구원의 때를 기다리라는 강조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인적 '재앙'이든 시대적 '재앙'이든, 그 모든 고난과 고통에는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적 메시지가 거기 있습니다. 고난 그 자체에는 늘 우리의 심령을 깨우기 위한 세미한 계시성이 또한 거기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일개 '티끌'처럼 겸허한 자세로 자신을 성찰하며, '들을 귀'를 살려서 그 섭리적 계시성을 들은 자들에겐 늘 보다 가치 있는 아니 진실로 가치 있는 아니 '영생'하도록 가치 있는 '미래와 희망'이 또한 주어졌습니다.        

과연 선지자 예레미야의 저 예언의 말씀 역시 역사상 그렇게,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바벨론 70년 포로 생활후에 강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민족은 고국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무명의 시편기자의 절절한 신앙고백처럼 우리가 바벨론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노라”(시편137:1), 그렇게 망국의 한을 안고 시온을 기억하며’,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애타게 구하고 찾으며 살았던 그 고달픈 포로생활 그 애달픈 노예생활. 그래서 또한 그 재앙속에서도 함께하시며 돌봐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70여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조국 땅 시온에 다시 돌아와 예배드리며 찬양할 수 있었던 저들의 감사와 감격의 분량은 바벨론의 그 어떤 고산준령보다 크고 높았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이자 미래와 희망이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마침내 성취된 것입니다. 성경의 참 말씀(眞理)’이 참 말씀으로 증언된 것입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살다보면 오늘 우리시대 지금 여기서 창궐하고 있는 신종 코로라 바이러스를 포함해서 개인 차원에서든, 공동체 사회나 민족이나 국가 차원에서든, 우환질고를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불행한 고난이나 재앙은 늘 있기 마련이지만, 그런 재앙 속에서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해서, 하나님을 찾고 만나게 되면그 모든 고난이나 불행이나 재앙이 되레 보다 나은, 보다 복된, ‘미래와 희망(hope)’이 됩니다. 보다 성숙한 미래와 희망이 됩니다. 오늘의 재난내지 재앙이 되레 미래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산 소망이 된다는 것입니다.

 

희망, 소망곧 히브리어 티크바기대하다, 열심히 찾다, 기다리다는 동사 카바에서 유래된 명사입니다. 과연 진정한 희망은 하늘에서 절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유산처럼 부모에게 물려받은 거기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흙수저나무수저신세여도 낙심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내가기도하며 기대하고, ‘내가열심히 찾고, ‘내가인내하며 기다리는 삶 속에서 미래의 참 희망이자 산 소망은 유래되고 창출되어지는 것이니까요.

 

 개인 차원에서 그 일례로, ‘의 경우를 일별해봅시다. 부유했던 동방의 의인욥은 그 부유한 재산과 열 자녀를 연이어 인재(人災)와 천재(天災)를 통해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심지어 그 자신마저 온몸에 오늘의 피부암 같은 악창이 나서 잿더미 위에 앉아 기와조각으로 긁어대는처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재앙의 와중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Redeemer)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기19:25-26)

 

()의 토로이자 치열한 각오로 임하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끈질기게 매달리는 구도(求道)의 열정입니다. 얍복강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던 야곱’(창세기32:)처럼 그렇게 결사적인 매달림이자 구하고 찾고 두드림입니다. ‘내 육신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라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그렇게 하나님을, 구속자이자 대속자인 메시아(그리스도), ‘기대하고, 열심히 찾고, 인내하며 기다리던욥은 마침내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뵙고”(욥기42:5), ‘티끌과 재'처럼 허무한 인생이자 별것도 아닌 인생인 자기가 율법적 의인으로 자처하며 살아왔던 지난 삶을 충심으로 회개한 후,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그 '은혜의 비밀'에 열려지면서 영육 간에 배전(倍前)의 축복을 받는 성숙한 신앙인격으로 거듭납니다.

 

아울러 민족 내지 국가 차원에서 그 일례로, ‘극히 큰 성읍 니느웨의 경우를 일별해봅시다. 신정국가 이스라엘로썬 이방국가이자 적대국가인 아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는 각종 우상들을 숭배하며 전쟁과 약탈을 일삼는 지극히 난폭하고 냉혈적인 백성들의 성읍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악독(惡毒)이 하나님 앞에 상달했던”(요나1:2) 지경에 이른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말세의 고통으로 들끓었던 성읍이었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동양의 고전 명심보감에도 악관약만 천필주지(惡罐若滿 天必誅之)”라는 금언이 있습니다만, 과연 악이나 교만이 그릇에 가득차면 하늘은 필히 그 그릇을 깨뜨려버리고 맙니다.” 각종 괴질과 말세의 고통난리와 난리의 소문들속에서 살아가는 오늘 이 시대의 저도, '신천지집단'도, 한국교회도, 남한과 북한의 사회도, 그것을 늘 유념 및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여하간 하나님은 그렇게 악독이 가득한 니느웨선지자 요나를 보내서 현재적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요나3:4)

 

그러자 완악하고 패역한 니느웨 백성들이 의외로 그 심판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회개합니다. 그런 민심의 동향을 읽은 니느웨 왕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합니다. 심지어 조서를 내려 사람은 물론이고 짐승인 가축들까지도 식음을 전폐하고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각기 악한 길에서 떠날 것을 공포합니다.

죄악이 들끓던 완악한 삶을 끝내 회개하지 않고 타락한 사욕과 교만한 패역을 일삼다가 마침내 멸망당했던 '소돔과 고모라 성'의 그 역사적 전철을 반면교사로 삼기라도 했던 것일까요. 여하간 그렇게 회개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하고, 열심히 찾고, 인내하며 기다리던저들은 그래서 마침내 당대의 심판을 면하고 살아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요나3:10)

 

그렇게 오늘의 재앙에서 도 살아나고, ‘니느웨 백성들도 살아났습니다. 그 다음은 저들의 진솔한 회개의 삶을 본받아 거듭나야 할, 다시 살아나야 할, 저의 차례이자 우리의 차례일 것입니다.

그럴 것이 하늘무서운 줄 모르고 자기그릇내지 자기네 그릇에 실상인즉 별것도 아닌 인간들 자기중심의 이기적이고 이념적이고 물질만능적이고 탐욕적이고 패권적인 우상이나 악독의 분량을 가득 채우고, 그래서 네 편, 내 편양극으로 분열되어 서로 대립 반목하며 '괴질 감염병'에 걸린 사람들처럼 이웃을 예사로 해치는 비인간적 작태나 말세의 고통이 정치적 내지 직업적으로 날로 자행 및 고조되는 세태이다 싶으니까요. 그래서 '어둠의 시간들'이 깊어지고 길어진다 싶으니까요.

 

늘 기도에 힘쓰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실제적인 삶을 강조한 찰스 스탠리 미국 목사이자 박사가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어둠의 시간들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 분의 목적을 성취하시는데 필요한 만큼 지속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목하 세계 도처에서 창궐하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 분의 목적을 성취하시는데 필요한 만큼 지속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 재앙을 위시해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갈등과 대립과 반목을 일삼는 모든 재앙난리어둠의 시간들이 저를 포함한 개개인이나 한국교회의 차원에서도, 한국사회의 차원에서도, 보다 정화되고 보다 성숙 및 성화된 신앙인격이 되고 신앙풍토가 되고 사회풍토가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회개 및 개혁의 계기이자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재삼 기원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개인이나 사회에 임한 모든 '재앙들'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보다 복되고 가치 있는 우리의 미래와 희망으로 산 소망으로 승화될 수 있기를!

 

그럴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지 못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고통받는 이웃'이나 '지극히 작은 이웃'에게 역지사지의 배려나 연민이나 자비를 베풀지 못하는, 그 어떤 종교적 도그마나 정치적 이념이나 권력이나 재물에 대한 사랑이나 집착은 그 자체가 실상인즉 별 것도 아닌 인간 자기들 중심의 '교만'이자 '우상 숭배'이자 죄다 그 결국이 허무한 이단적 내지 이기적 수렁이니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22:37~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