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살의 나이로 요양원에서 숨진 독일 작가 프란츠 카프카.
그는 그의 문제작인 중편소설「변신(變身)」에서 ‘돈’ 혹은 ‘자본’이
주인이 된 산업사회 내지 물질문명사회에서 일개 도구로 전락한
그래서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한 마리의 ‘벌레’로 그리고 있습니다.
늙은 부모와 누이를 부양하며 성실하게 살아온 외판원 그레고리 잠자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면서 흉물스런 한 마리의 ‘벌레’로 변신해 있는 자기 모습을 발견합니다. 벌레가 된 그는 직장에서는 물론이고, 가족으로부터도 버림을 당합니다.
그런 벌레는 유배지처럼 소외된 자신의 방안에서 스스로 택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앓다가, 어느 날 새벽에 쓸쓸한 명상 속에서 최후의 숨을 거둡니다. 그러자 세 가족은 그나마 연명하기 위해 다니던 직장에 결근계를 내고, 아픈 상처를 치유라도 하듯이 모처럼 교외로 소풍을 나갑니다. 그렇게 최소한의 희망을 그리면서 소설은 끝납니다.
그런 ‘소풍’이라는 희망은 ‘벌레’인 ‘내 죽음’이 ‘내 가족의 죽음’이 되기를 원치 않는 작가의 소망 및 배려이자 아울러 구원에의 희구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뜬구름처럼 막연한 ‘소풍’ 정도의 희망이 진정한 희망일 수는 없습니다. 그럴 것이 ‘벌레’인 채로 죽어가는 인간이 주는 ‘희망’은 자기에게도 가족에게도 ‘산 희망’이나 ‘산 구원’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인 성경을 알면, 작가 카프카의 ‘변신’은 그렇게 놀랄 일도 기이한 일도 아닙니다. 저 변신의 경우와는 요인이 다른 경우겠지만, 노아의 ‘홍수 심판’도 역시 당대 인간들의 성적으로 타락한 죄악으로 인한 인간들의 ‘변신’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세기6:3)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靈)’ 곧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다만 ‘육신(肉身)’으로 변신한 것입니다. 저 ‘육신’ 곧 히브리어 ‘바사르’는 ‘육체, 생물’을 의미합니다만 아울러 ‘하체, 남자의 성기’라는 의미도 가집니다. 따라서 더 심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다만 ‘하체’ 내지 ‘성기’가 된 것입니다. 성적으로 극도로 타락한 그래서 하나님이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실 정도로 동물화 되어버린 시대인 것입니다. 말씀의 계시대로 과연 120년 후에 그 땅 위에 ‘홍수 심판’이 임했습니다.
한편,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던 욥. 그가 열 자녀들과 재산을 천재(天災)와 인재(人災)를 통해 한순간에 잃고, 설상가상으로 자신마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서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긋고 있는’, 그래서 아내마저 그를 버리고 가버린 처참한 고난과 고독과 병고의 고통을 앓고 있는 무력한 인간의 모습 또한 하찮은 ‘벌레’ 같은 형국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인생, 벌레 같은 인생이랴.- (욥기25:4-6)
그럼 현대를 사는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곧 참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잃고 어떤 모습으로 ‘변신’해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돈과 출세에 대한 개인의 욕망과 자유를 부추기고 그것을 합리화 내지 정당화시키는 ‘자본주의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신자본주의 사회는 오직 ‘시장’이라는 무대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이긴 자가 부자가 되고, 권력자가 되고, 명사가 되는 사회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공이고 능력입니다.
그런 자본주의를 수백년 동안에 걸쳐 내적 면역성을 키우며 서서히 이룬 구미(歐美) 국가들과는 달리 불과 수십년 만에 ‘압축성장’으로 이룬 우리 한국사회의 이면에는 그래서 또한 함께 성장한 압축병폐(病弊)라는 불행한 그림자가 공존해 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성공한 지도자들의 ‘모범’에서 시작해서 심지어 청소년들에게까지 만연해있는 ‘부패공화국’이나 ‘섹스공화국’, 그리고 자살률 세계 1위(OECE)라는 오명이 그것을 단적으로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언론사나 관련기관들의 설문조사에 나타난 청년들이나 청소년들의 가치관을 보면 대다수가 돈과 권력을 가진 자가 곧 성공한 자이고, 주색 등 육체적 향락을 더 많이 누리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인식이 만연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각종 탐욕과 비리와 흉악한 성범죄가 날로 기승을 부리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말을 바꾸자면, 인간들이 이미 ‘육체’ 혹은 ‘벌레’ 등으로 변신되어 있다는 것. ‘경제동물’이나 ‘쾌락의 동물’이나 한편으론 일개 ‘상품’이나 ‘기계’ 등으로 변신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다 불행한 것은 재물이나 육체는 거기에 빠지면 빠질수록 마약 이상으로 그 중독성이 심화되어 결국엔 양심이 마비되고 그래서 악으로 되레 선의 가치마저 파멸시켜버린다는 그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우리 인간 및 시대의 진정한 구원을 위해서 보다 진지하게 고민하며 기도해야할 때입니다. 세상의 ‘압축성장’에 장단 맞춰서 “하면 된다”는 식으로 가르치던 그런 ‘성공철학’이나 ‘성공복음’이나 ‘부흥사복음’ 같은 ‘반쪽복음’의 비극적인 열매가 ‘압축병폐’라는 현실로 사회 곳곳에 이미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시대적 양심의 머릿돌이자 최후 보루가 되어야 할 교회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천민자본주의를 견제하며 그 병폐나 그 그늘을 구원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자본주의에 장단을 맞추며 들러리로 살아온 결과 ‘재물은 얻었지만 하나님을 잃은’ 교회는 그래서 되레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어 걸핏하면 도마 위에 오르는 신세가 되고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시 들어봅시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누가복음12:15)
재물을 탐하여 소유가 많아진 ‘부자’, 그것이 성공도 생명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천국’을 소유한 믿음의 사람이나 그 가족들이 세상의 삶에 필요한 돈이나 양식이 없어서 굶어죽은 사람들은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부자’나 ‘권력자’라고 해서 하루 4끼 먹고사는 것도 아닙니다. 호의호식이나 부귀영화가 사람의 영혼이나 양심은 차치하더라도, 육체를 순결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왕조시대의 임금들의 수명이나 현대인들의 각종 '성인병'에 나타난 사례가 그것을 대변해줍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나 세계를 선망하며 목을 매는 것일까요?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세상을 향해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을 부러워하는데 인생의 4분의 3을 쓰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가치나 존엄성은 우리가 부러워하는 그래서 잠자는 시간 이외의 일생을 남과의 비교 및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하는 저런 세상에서 오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경제 동물’이나 ‘배부른 돼지’나 ‘배부른 개’나 숫제 ‘금수만도 못한’ 변신은 우리 개개인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피차 불안해지고 불행해지는 일입니다.
그런 세상을 향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구원의 말씀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로마서16-18)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각각 살리는 인간의 진정한 생명이자 행복은 ‘벌레’나 ‘육체’ 같은 생물적 내지 동물적 변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자 거룩한 변신에 있습니다.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성(靈性)입니다. 영성은 추상적인 것도 미신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인도하는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그것이 진정한 영성입니다. 말씀을 떠난 영성은 미혹입니다.
그런 영성은 남과의 경쟁이나 포플리즘 같은 대중심리나 군중 세력을 통해서 오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골방’이나 ‘광야(사막)’나 ‘기도’ 같은 고독을 통해서 옵니다.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 일의 관계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영성학자 헨리 나우웬의 분석처럼, “혼자 있음(aloneness)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고독(solitude)은 평화스러운 일입니다.”
말을 좀 쉽게 풀자면, 홀로 있는 고독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러나 ‘성령 안에 있는’ 곧 하나님 및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고독은 평화스러운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고금의 영성의 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독한 삶의 길이 더 좋아서 스스로 그 길을 간 것입니다.
아무쪼록 치열한 경쟁의 전장 같은 때론 동물의 세계 같은 세상이 결코 주지 못하는, 그런 하나님의 의로움과 평안과 기쁨과 이웃과 공존하고자 하는 여유가 더욱 풍성해지고 성숙해지는 우리의 심령이 되고, 삶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처럼 진실로 ‘세상을 이기는 평안’이자 영성이기 때문입니다.
*한 그리스도인의 영성 편지(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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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이 절망의 마지막을 볼 때,
믿음의 사람은 무한한 소망을 보고 기뻐한다.-
*길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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